작가의 시 36

첫눈이 내리는 날에

첫눈이 내리는 날에 김의중 가랑잎 바스락거림이 잠잠해지고 깊은 사색의 무거운 침묵이 머무는 거리에 첫사랑처럼 설레는 첫눈이 내린다 가로등 아래로 나풀거리며 내리는 눈꽃송이 반가움으로 내미는 손끝에서조차 눈물로 스러지는 순결한 영혼 하얗게 표백된 마음으로 오늘은 서로의 허물을 감싸며 용서하자 아니, 부끄러운 손 먼저 내밀고 용서를 구하자 바라는 소원만큼 많은 양이 아니어도 첫눈이 있기에 겨울은 아름답고 세상은 살아갈 만큼 훈훈하다 머지않아 매정한 바람이 불고 얼음도 얼리라 벗은 몸으로 겨울을 나는 가로수 곁에 서서 첫눈을 맞는 내 가슴은 얼마나 따뜻한가 시집 99쪽

작가의 시 2023.12.01

장미공원에서

김 의중 세월이 거두어가고 남은 시간을 문학산장미공원에 풀어놓고 앉았다 제철을 맞은 꽃들이 저마다 시간을 아끼듯 활짝 피어있다 메이딜란드, 토코나츠, 골드리프... 낯선 이름들로 머리는 어지러워도 너무나 화려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에 가슴은 마냥 젊어진다 내면의 원초적 욕망으로 영혼을 유혹하는 섬세한 꽃술에 코끝을 대어본다 아득한 우주의 신비가 스민 향기 너는 어느 별에서 날아와 사랑의 꽃이 되었고 나는 또 어떤 입자들의 사연으로 고독을 알아버린 내가 되었나 떨어진 꽃잎하나를 주워들었다 어쩌다 인연의 고리를 놓아버렸을까 떨어져야할 시기를 너무 빨리 알아챈 꽃잎 우리가 바람결에 티끌로 사라져도 우주 안에서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려니 집었던 꽃잎을 놓아주며 잠시 깊고 먼 하늘을 쳐다본다

작가의 시 2016.09.02

산청 수선사에서

김 의중 잔잔한 미소로 권하는 차 한 잔에 스님의 어린 시절 사연이 녹아있다 빈 잔 덧 채우는 감미로운 다향(茶香)에 내 귀가 솔깃해진다 고독한 득도(得道)의 이정표 뒤편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 가난에 절은 짜디짠 사랑이 오늘 목탁을 울리는 게송(偈頌)이 되었다 앞산 송림사이로 수선거리며 내려오는 솔바람 접견실 처마 끝에서 반기는 풍경(風磬)소리가 청량(淸凉)하다 초겨울의 정갈하고 경건한 경내 돌로 다듬어놓은 마음(心)* 물로 정하게 씻고 저녁노을 곱게 물드는 수선사를 떠난다 귀에 남은 스님의 목소리 솔바람소리 풍경소리 *경내 작은 연못에 돌로 심(心)자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물이 흘러내리게 했다.

작가의 시 2013.10.23

<소래포구의 봄>

김 의중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나더니 오늘따라 소래포구 갈매기의 날갯짓이 가볍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직도 차가운 바람결에 나부끼는 햇살사이로 언뜻 봄의 미소를 본 듯도 하다 바다로 이어진 좁은 물길로 소래포구는 용케도 질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망가진 어제의 흔적이 오늘의 소중한 낭만이 되기도 하는 곳 버려진 수인선 옛 철길이 가슴을 아련하게 하고 장도포대 한가로운 댕구산엔 겨우내 추위에 떨던 오동나무 대추나무, 산뽕나무와 다래나무가 그늘진 한 시절의 이야기를 나긋하게 속삭여준다 짜디 짠 삶의 언어들이 비릿하게 널린 어시장 차도 사람도 갈매기도 저마다 바쁘기만 한데 해안산책로를 따라 느린 시간으로 걷는 노부부와 나풀거리며 따라가는 어린 소녀 모처럼 만의 외출에 속박의 끈이 풀린 강아지는 여..

작가의 시 2013.02.21

<풀잎의 노래>

김 의중 한 해의 삶이면 족하리라 대지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머리도 가슴도 다 비우고 오직 초록빛 외길사랑 하나로 더 없이 자유로운 영혼이여 나무의 무성함도 부럽지 않고 꽃의 화려함도 시샘하지 않는다 갈대인들 어떠하며 잡초라 한들 어떠랴 산과 들 가리지 않고 옥토 박토 탓하지 않으며 냇가 혹은 길가 뿌리내리는 곳에 생명의 고향을 심어간다 별빛에 속삭이는 삶의 이야기 봄 아지랑이 속에 태어나 비바람 거친 날과 뜨거운 햇살 다 견디고 찾아오던 벌 나비들 제 갈 곳으로 다 떠나면 목숨으로 지켜낸 초록빛 하늘에 내어주고 눈 덮인 대지에 낡은 뿌리 돌려주며 애틋한 사연 세월에 담아 내일로 보낸다 아, 한 곡의 노래로 부르면 넉넉할 풀잎의 생애 더 무엇이 아쉬우랴 한 해의 삶이면 족하리라 한 곡의 노래라면 넉넉하리라

작가의 시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