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보낸 글)

서신(보낸 글) 006 <항도에서 읽는 산마을소식>

필그림(pilgrim) 2007. 6. 11. 18:27

<항도(港都)에서 읽는 산마을소식>


학마을님!
저녁식사를 위해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습니다.  순간, 반가운 님의 글 '산마을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아직 주방에서 서성이던 아내를 급히 불러, 님이 보내주신 복분자 천연의 맛과 향을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음미해 봅니다. 
식사 전의 공복으로 허기진 탓만은 아닐 텐데 마음은 이미 님이 주신 정이 담긴 그 복분자로 인해 포만감이 충만합니다.
무엇보다도 형수 소리를 들은 아내의 얼굴이 음식을 통해 얻는 만족함보다 더 화사하게 피어올랐음을 님은 아셔야 합니다.

학마을님!
님이 보내주신 '산마을소식'은 문명과 문화의 이름아래 인간이 만들어 낸 진구(塵垢)와 오예(汚穢), 허영으로 뒤덮인 이 국제도시에서 생존의 각박함과 비정(非情)으로 인한 외로움에 지친 나에게 있어선 대륙과 대양의 바람이 어우러지는 태백으로부터 불어오는, 영혼의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청량하고 상매(爽邁)한 그리움의 바람이며 벗에 대한 정의(情誼)가농후하게 배어있는 정친(情親)한 바람입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님의 맑은 이성과 따뜻한 감성을 언제나 신선한 감동으로 머리와 가슴에 가득 채우고 있는 내 모습 또한 님은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학마을 님!

제3 공화국이 출범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의미야 이 시간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혀 관심 밖의 일입니다.  다만 나는 젊은 날의 이상과 우정을 나누던 잊을 수 없는 한 친구를 생각할 뿐입니다. 

심장이 약했던 그는 감기로 누워있는 자리에서 문병 온 친구들에게 내가 보이지 않은 까닭을 묻더랍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픈 걸 알면 그 친구는 꼭 올 거야'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나는 가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가지 않았습니다.  감기쯤이야 하는 그릇된 인식과 심장질환에 무지했던 소치로 인해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음을 범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각별한 믿음과 꿈을 나누던 사이였음에도 끝내 그의 임종을 지켜준 친구들 틈에 끼지도 못한 채 그를 보낸 것입니다.  63년 12월 17일의 일입니다.

그렇게 그는 속절없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지나기까지 내 마음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덜어지지 않는 무게로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이 몸 흙이 되어 땅에 묻히는 날, 내 영혼이 자유를 얻는 그 날에 나는 그에 대한 그리움의 줄을 비로소 놓을 것입니다.


학마을 님!

오늘밤 황색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남국의 이 도시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굵은 눈물방울 같은 그리움의 빗줄기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산마을 소식'이 전해 준, 님의 훈향 탓에 잔잔한 감동으로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창밖엔 달빛도 없습니다.  도심의 불빛들도 빗줄기와 농무에 가려 내려다보이는 가로등조차 희끄무레한 실루엣으로 다가설 뿐입니다.

잠시 일어나 베토벤의 ‘로망스’와 와이만의 ‘은파’를 CD플레이어에 넣습니다.  내일 딸아이에게 보내 줄 <아침의 명상>을 메모해보며 미처 끝내지 못했던 수필 한 편을 마저 정리해 봅니다.


학마을 님!

내내 보중하시고 건안 하시기 바랍니다.  태백의 기상같이 강건 하시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난해 사태의 상흔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음을 님의 글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순조롭기를, 그리고 명경지수 같은 님의 마음을 담은 글들이 이슬에 목욕한 꽃잎처럼 무한한 순수로 피어나기를 염원할 뿐입니다.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님에게 보냅니다.


Hong Kong에서

제우스 올림



* 추신

1)  님의 글을 받은 날 즉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수필 한 편을 첨부해 보내기를 눌렀는데 로그인을 다시 하라는 메시지가 뜨더군요.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로그인을 다시 했더니 이제까지 쓴 글이 감쪽같이 사라지더군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중국엘 다녀오면서도 머릿속에는 님에게 보내기 위해 썼던 글귀들이 가물가물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수첩을 꺼내 메모하면서 서둘러 홍콩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젯밤 다시 님에게 보내기 위해 메일Box를 열면서 기억을 더듬어 먼저 썼던 내용을 거의 90% 이상 복구해 놨는데 보내기를 누르니 서비스 잠정중단이라는 메시지가 나오더군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뒤로 가기를 눌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애써 쓴 글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네요.  참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곳 시간으로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세 번째 메일을 작성한 셈입니다.  굳이 먼저 쓴 글에 집착한 것은 공들여 서술한 내용이기 때문이며 적어도 님에게 보내는 글에 담은 정성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님께서는 이 글을 세 통의 메일로 생각하시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2)  수필마당에 대한 님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아직도 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많은 분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수필마당에 님의 복귀를 권고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올리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거절할 명분이 없어 회신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의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한번 돌아선 길이겠으나 비교가치가 아닌 절대가치로 본다면 이곳도 문학의 이름으로 보호되어야 할 만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 공간이며 더욱이 님의 흔적이 배어있는 공간입니다.

님께서 직접적인 참여를 굳이 피하려 하신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님의 소식과 혼이 담긴 옥고를 전해도 될는지요?

3)  엊그제 쓴 졸작 수필 <어떤 고백> 동봉합니다.

 

<어떤 고백>은 '작가의 수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