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계곡으로 가는 전차>
글 / 김 의중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모처럼 만에 얼굴을 내민 햇살이 반가와 창문을 열었습니다.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바람이 따라 들어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커튼을 젖혀 그들의 방문을 환영하며 아내를 불러 이 화사한 계절의 유혹을 견딜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외출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에 아내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르며 ‘어쩜 그렇게 내 생각과 똑 같을까?’ 하는 표정입니다.
‘어느 옷을 입을까?’ 아무리 행복한 순간에라도 여자들은 쓸데없는 작은 고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나들이를 위해 정장과 간편한 원피스,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를 번갈아 입어보며 거울 앞에 서서 내 의사를 거듭거듭 묻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조차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럴 경우 남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을 겁니다.
“당신은 어느 옷이나 잘 어울려.”
“당신 참 예쁘다. 그 옷 잘 어울리는데?”
그러나 내 대답이 늘 그렇듯 싱겁도록 간단하다는 사실을 아내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눈부신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 탓이 아닐까요? 아니면 낯선 남국의 나라에서 문밖에만 나서도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 때문일 까요?
“조우산!”
“굿모닝!”
아파트의 로비를 나서며 경비실 아저씨의 아침인사에 화창한 날씨보다 더 화사한 얼굴로 헤프지 않은 함박웃음을 담뿍 담은 채 화답합니다. 클럽하우스 앞에서 잠시 올려다본 하늘에는 실구름이 한가롭습니다.
얼굴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만큼이나 내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작은 손이 보드랍습니다. 남들의 눈이나 나이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내의 재잘거림은 마치 새들의 노래와도 같이 정겹게 이어집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침사추이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얼마 전 태권도 국제심판으로 미국을 다녀온 어느 커플의 점심초대에 잠깐 참석하였다가 하버 뷰(Harbour View)를 건너 홍콩아일랜드로 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날의 일정을 정하는 것은 나에게 부여된 몫이었습니다.
홍콩아일랜드의 MTR(전철) 종점에서 내려 밖으로 나온 후 트램(電車) 정류장에 이르러 잠시 망설였습니다. 여러 번 트램(Tram)을 이용했어도 사실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까지 가는지 그 자세한 노선을 여태껏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서있는 곳이 서쪽의 셍완(上環)이니까 동쪽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궤도는 왕복차선으로 길게 뻗어 있어도 가는 목적지가 그렇게 많은지는 나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툰 안내자(Guider)라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불안스럽게 겉으로 나타내 보일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때입니다. 하늘이 정다워 보이는 우리부부를 예쁘게 봐준 모양입니다. ‘Happy Valley'! 한자(漢字) 표시로는 전혀 의미가 다른 지명이었지만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오직 영어로 표기된 Happy Valley만 눈과 머리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트램이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저거 타자. Happy Valley가 어딘지 거기까지 가 보자.”
아내는 내가 전혀 가 본 경험도 없는 곳으로 자신을 안내하고 있다는 불안한 사실도 잊은 채 낭만에 젖어 딱딱한 의자에 에어컨도 없이 덜커덩거리는 이층트램에 올라탔습니다. 낭만을 느끼는 게 어찌 아내뿐이었겠습니까? 분명히 꽃향기에 취했거나 부서져 내리는 금빛햇살, 바다를 건너온 바람 탓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지금 행복의 계곡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있지만 행복을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 행복을 전해주러 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덜커덩거리는 불협화음과 흔들림조차 아내는 즐거워합니다. 나 역시 아내가 즐거워하는 게 싫을 까닭이 없습니다. 덜커덩거림만이 아니라 춤을 춘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이 시간만큼은 분명, 아내가슴에 그리고 내 가슴에 행복이 차고 넘침을 느끼니까요.
트램이 멈췄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립니다. 아마도 여기가 종점인 모양입니다. 내린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우리부부의 눈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까운 곳에 계곡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Happy Valley는 그냥 상징적인 지명인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우리가 내린 곳은 낯설기는 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같은 하늘아래, 불어오는 바람도 그 바람이었으며 사람들이 오가는 길과 건물, 달리는 자동차들과 상점마다 진열되어있는 물건들이 동(動)과 정(靜)으로 인생과 자연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평범하게 전해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일탈(逸脫)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日常)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왕에 내린 낯선 Happy Valley이지만 어느 곳이든 우리 삶의 일상적인 카테고리(Category)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곳이라면 거부감 없이 익숙해져야할 공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길가 상점들의 쇼윈도를 기웃거리며 잠시 걸었습니다. 각종 값비싼 가구들과 화려한 의상들, 눈부신 보석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 부부의 마음에는 그것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만일 우리가 저런 것들을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 지금은 절실하게 소용되지도 않는 물건들이기에 주어도 달가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슴에 저런 값진 물건들 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발걸음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타임스퀘어(時代廣場)라는 빌딩 앞에서 멈춰졌습니다. 몇 층까지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층마다 눈길 미치는 것들을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오픈 카페가 있기에 시원한 음료수를 주문해 마시면서 피곤한 다리를 풀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 자신의 타임스퀘어에 머물고 있습니다. 내 앞에 아내가 앉아 있으며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나는 아내의 가슴속에 내가 준 사랑과 함께 행복이 가득 차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아내의 맑은 눈동자 속에 비춰진 내 모습 또한 마찬가지임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화사했던 아침 햇살도 어느덧 노을을 물들이는 석양으로 바뀌어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면 엘가의 ‘사랑의 인사’나 구노의 ‘세레나데‘, 베토벤의 ‘로망스‘를 들으며 우리가 느낀 오늘 하루의 행복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하겠습니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Happy Valley는 공동묘지가 있는 지명임. 서울의 망우동(忘憂洞)과 같이 묘지가 있는 곳에 붙인 지명으로 두 곳 모두 유사한 어의(語意)를 갖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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