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명상(瞑想)>
글 / 김 의중
계절의 깊이만큼 침묵의 무게가 가슴에 내려앉는 밤입니다.
창밖에는 스산한 바람에 아련한 별빛조차 몸을 떱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외로운 낙엽의 방황하는 흐느낌이 사각사각 작은 소리로 겹유리로 된 문틈사이를 비집고 하소연합니다.
아니 그것은 그냥 느낌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외로움은 낙엽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목(裸木)이 되어 가는 나무도 아픔은 마찬가지겠지요.
어쩌면 운명을 알고 견디는 아픔이 더 클지도 모를 겁니다.
이미 보름을 넘긴 달빛이 저만큼에서 기웃거리는 겨울의 다가옴을 예고라도 하는 듯 얼음처럼 차가운 입김을 하얗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방안은 밖의 적막과 같은 정적이 흐릅니다.
그 고요한 침묵이 불러오는 고독을 못 이겨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베토벤의 '월광'과 드뷔시의 '달빛'을 CD플레이어에 넣습니다.
아무래도 이 음악을 듣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또다시 한 잔의 커피를 타야할 것 같습니다.
음악이 흐릅니다.
창밖에는 바다를 지나고 산을 넘어온 둥근 달이 피곤한 모습으로 조금씩 제 몸을 일그러뜨리며 머지않아 떠나야할 쓸쓸한 가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음악은 달빛을 어루만지듯 잔잔히 울려 퍼지고
달빛은 외로운 이의 가슴에 그리움을 담아주며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그리움은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이 시간만큼은 다른 어떤 소중한 것들로도 이 그리움을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달빛에 녹아있는 음악이 가슴속 깊은 심장의 중심부까지 세밀한 모세혈관을 따라 그리움의 파장을 전해줍니다.
아직도 따스함이 손끝에 전해지는 커피 잔을 들고 남아있는 향기를 코끝으로 들이마시며 깊숙하게 심호흡을 해봅니다.
가슴의 후련함은 신비롭게도 머리를 상쾌하게 합니다.
마음이 맑으면 정신도 말짱하듯이 말입니다.
커피한잔에 타서 마시는 그리움 탓일까요?
아니면 달빛을 타고 흐르는 소나타의 선율 때문일까요?
가을이 지닌 사색의 깊이를 생각하며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이제까지의 삶에서 몇 번의 가을을 기억할 수 있는가?
앞으로 몇 번의 가을을 더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이 가을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지혜를 갈구했음에도 아직도 어리석고
가난이 지겨워 그토록 저항했어도 마음은 여전히 가난하며
행복을 소원했으나 지금 외로운 까닭은 무슨 이유일까요?
아무래도 '페이터의 산문(散文)'에 나오는 '황금의 잠언(箴言)'이라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아직도 미완성인 자신에 대해 고뇌하는 마음으로 성찰해 봐야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봅니다.
초침은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회전합니다.
자세히 살피면 아주 미세하지만 분침의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침의 움직임은 좀처럼 눈치를 챌 수가 없습니다.
순간의 움직임은 확인할 수 없어도 시침도 분명히 움직임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란 그렇게 누가 확인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정확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잡아두려 해도 그것만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만큼 우리는 늙어갑니다.
더러는 지나온 시간보다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다시 한 번 시계를 봅니다.
책상 위의 탁상시계는 아날로그 표시방식이기에 우리는 시간의 움직임이 잘게 나누어진 공간의 이동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주어진 시간에 존재하는 공간의 활용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공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니까요.
어느새 음악도 끝나고 달도 서편으로 기울어갑니다.
바람을 휘몰아 떠날 길을 서두르는 가을의 깊음처럼 이 밤도 새벽을 향해 가야할 길을 재촉합니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남겼던 커피가 제 본래의 향을 다 날려 보낸 채 이미 차갑게 식어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 밤이 다하기 전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며 이제는 단꿈을 청하기 위해 침대로 가야겠습니다.
다만 이 가을이 다하기 전 아쉬움이 없기를,
그리고 인생이 다하기 전 후회가 없기를,
심산의 계곡처럼, 밤의 어둠처럼, 가슴에 서려있는 한 맺힌 그리움처럼,
깊게 우수를 내린 이 가을의 깊이를 헤아리며 창가에 걸린 커튼을 드리우듯 이 시간 마음의 창도 조용히 닫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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