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다녀와서
2일(목) 강화도 문학세미나를 시작으로 3일(금) 속초를 거쳐 이튿날(토) 강릉 김동명문학관 방문과 엄창섭 교수님과의 대담, 영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일(일) 김삿갓문학관 방문과 묘소 참배, 그리고 진주에서 강희근 시인을 만나고 6일(월) 인천으로 돌아온 여정은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하는 노령의 후문학파인 제가 비장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출발한 순례의 길이었습니다.
김동명문학관에서는 시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 제 문학의 뿌리와 김동명 시인의 장녀인 월하누님과의 인연을 더듬어 보고 엄창섭 교수님의 주선으로 심상순 하슬라문학회 회장님과 김동명선양회의 정계원 시인과의 만남에서 한국문단의 현실과 ‘한국문학 순례의 길’ 조성에 관한 이야기, 김삿갓문학관에서는 삿갓 어르신의 묘소부터 들러 시대의 비운에 뜻을 펴지 못하고 스러지면서도 고귀한 문학적 가치를 유산으로 남기신 훌륭한 스승에 대한 추모와 후학으로서의 다짐, 그리고 문학관 뒤뜰에 세워진 김남조, 이승훈, 오탁번, 오세영, 문효치, 강희근, 유안진, 신달자 등 쟁쟁한 문인들의 시비를 둘러보고 진주에 도착해서 강희근 시인 내외분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우리가 남겨야 할 시대의 언어와 한국문학의 위상, 그리고 연안문학회의 활동에 대해 가슴을 터놓고 나눈 정감 어린 대화로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을 촉발한 예이츠와 존 밀링턴 싱의 만남처럼 한국 문예부흥의 불씨를 지피고자 했습니다.
인생의 길이 그렇듯 순례의 길도 순탄치만은 아닌 듯 시련도 있었습니다. 김삿갓문학관에서 풍기IC에 진입하기 위해 마구령을 넘어 내려오는 길에 길가 과수원에 탐스럽게 열린 사과를 보고 강희근 교수께 한 상자 드리고 싶은 생각에 상가가 있는 곳에 이르러 정차하기 위해 차를 돌리다가 우측에서 제 차를 앞서려던(이것은 상대의 잘못) 차가 제 차를 받은 것입니다. 보험으로 처리하면 충분한 사고였지만 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2차선에서 상가의 주차선이 있는 곳으로 진행할 때 뒤에서 오는 차가 우측으로 빠져나가리라고는 저도 미처 생각지 못했으므로 상대편 운전자에게 제가 부주의했던 점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보험으로 처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를 살펴보니 제 차는 스크래치가 제법 크게 나고 약간 굴곡이 진 곳도 있었으나 상대방의 차는 도색 스프레이로 살짝 뿌리면 감쪽같을 아주 미세한 스크래치가 두 곳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당당해서인지 매우 완강하고 거칠었습니다. 양측 보험회사 직원이 현장을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끝내고는 가셔도 좋다고 하여 풍기IC로 진입해 안동휴게소에 이르자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상대방 운전자가 입원하겠다는 데 동의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입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설명하자 입원에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고 1년이든 몇 년이 걸리든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건 직원이 이런 사례가 고객님만 겪는 일이 아니라 비일비재하다고 하면서 소송이 걸리면 오라, 가라 성가신 일로 몇 년 시달리게 되니 빨리 끝내려면 동의하시는 게 좋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면 쌍방과실이니 이쪽에서도 소송을 제기해도 된다고 안내합니다. 심장이 떨리고 분노가 치밀었으나 그냥 빨리 끝내고 잊어버리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조심성이 부족했던 제 잘못이니 아내를 위해서도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에 적응이 안되는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문학순례의 길에 나서기 전, 연안문학회 톡방에 삶의 명암(선악)에 관해 헤세의 데미안을 인용한 글을 올렸던 것이 선견지명이었는지 운명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직은 잠들기 전에 더 가야 할 길,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에 스스로 달래며 차량 수리를 위해 부여 백제박물관 방문일정을 취소하고 하루를 앞당겨 돌아왔습니다.
강릉 김동명문학관에서 유익한 대화와 새로운 만남을 주선해 주신 엄창섭 교수님과 무엇보다 이번 순례길의 중심이 되는 강희근 교수님의 ‘연안문학회 가입과 상임고문 추대서 전달’이 마음을 열어주신 강 교수님의 특별선물(시화 액자)까지 받으면서 순조롭게 성사된 일에 깊이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연안문학회가 한국문단의 새 지평을 여는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에 앞장서도록 여러분 모두 깊은 관심과 열정으로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Nov 07(Tue), 2023.
'동인문학 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안문학 창간사> 한국문단의 새 지평을 열며 (2) | 2023.12.20 |
---|---|
연안문학회 출판기념회 및 송년회를 끝내고 (2) | 2023.12.15 |
가슴에 담아본 두 편의 시 (0) | 2022.08.28 |
전애옥 시집 '봄 밭에 서면' 발문 (0) | 2022.06.23 |
2021년 세모에 (0) | 2021.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