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 의중
-여행의 배경-
딸아이가 고3이었을 때, 여고시절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다만 며칠만이라도 아빠하고 같이 지내고 싶어 했습니다. 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고요. 자녀들의 대학입시를 경험한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고3이라는 상황이 어디 보통상황입니까? 준전시하의 초비상상황이 아닙니까?
본인의 스트레스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가족들까지 발걸음은 물론 숨소리조차 고르게 쉴 수 없는 게 고3자녀를 둔 우리나라 일반가정의 현실이니까요.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어디가 잘못되었기에 이 고질병을 고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보다 더한 것을 요구한다 해도 들어줘야 할 판에 머리를 식히기 위한 며칠 동안의 여행이야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딸아이의 고3추억 만들기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딸아이의 의견을 먼저 물은 뒤 8월 하순의 어느 날로 2박3일간의 일정을 정하고 진주로 내려가는 출장길에 아내대신 딸아이가 동행하도록 했습니다. 아내도 두말 않고 선뜻 찬성을 하더군요.
그러나 아내의 눈치를 살피니 눈가에어리는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제 눈길을 슬쩍 피하는 것으로 감추고 맙니다. 하지만 나는 다 압니다. 그런 정도 알아내는 거야 결혼 후 눈칫밥 20년에 어찌 도사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셋이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아들 녀석만 빠지게 되니 이건 아들은 물론 아내와 내가 수용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아내는 아들 녀석이 있는 쪽을 흘낏 돌아보더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럴 겁니다. 사실 딸아이가 오직 아빠만을 따르는데 대한 공평한 저울질이었는지는 몰라도 신통하게도 아들 녀석은 딸아이한테 자주 남편을 빼앗기는 엄마를 배려해 늘 엄마 편에 서고자 했고 아내도 그게 고마웠던지 아니면 얄미운 딸보다는 아들이 더 사랑스러웠던지 어쨌든 은근히 아들 쪽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눈치였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모든 고3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한결같은 심정이겠습니다만 아내도 아이가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또 개인적으로도 그동안 뒷바라지하느라고 쌓였던 본인의 스트레스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기에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운전석 옆자리를 기꺼이 딸아이에게 양보하기로 한 것입니다.
-출발-
출발에 앞서 이것저것을 챙겨주면서 아내가 말합니다.
“이번 기회에 아이 스트레스도 풀어주고 부녀지간에 좋은 추억거리 만드세요. 조심해서 운전하시고요. 그리고 딸아이한테 너무 흠뻑 빠지면 안돼요. 알았죠?”
마지막 말은 딸아이가 들을세라 귓속말로 속삭이는데 생각으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도 아내 앞에 장승처럼 선 몸은 머리를 끄덕이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아내도 딸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잘 알면서도 일단은 자신의 존재가 딸아이보다는 우선해야한다는 확실한 인식을 제 머리 깊숙이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딸아이한테 흠뻑 빠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풍덩 빠져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구제가 불가능한 가련한 존재였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겨우
“당신도 우리 부녀 없는 사이 아들 녀석하고 모자지간에 좋은 추억거리 만들구려. 아들 녀석한테 너무 푹 빠지지 말구....”
하는 말로, 겉 다르고 속 다르게 고개를 끄덕인 알 수 없는 마음을 감추면서 어설픈 웃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얼굴에 가볍게 작별의 입술을 대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기까지 너무 잦은 교통체증에 시달린 탓인지 정작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차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딸아이는 뒷좌석 팔걸이 아래에 있는 쿠션을 집어 머리에 베개 삼아 받치더니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대개의 고3생이 그렇듯 원(願) 없이 잠 한번 자봤으면 하는 게 그들의 소원 중 하나일겁니다. 카오디오에 드보르자크의 신세계교향곡 테이프를 넣고 볼륨을 적당하게 조절한 후 아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의자를 뒤쪽으로 약간 제쳐주었습니다.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입니다. 서둘지 않고 가면 중간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남짓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뉴스가 있었지만 날씨는 쾌청하기만 합니다. 아직은 제주 남해상 먼 바다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모레쯤이면 한반도에 상륙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따가운 태양이 온 몸으로 한반도의 대지를 달구며 늦여름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태양이 이처럼 뜨거운 열기를 지구를 향해 무한정 뿌려대면서도 그 수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 또한 묘하게도 23.5°의 자전축으로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면서 구름과 바람으로 그 뜨거운 열기를 요리조리 분산하여 자신의 내부에 생존하고 있는 뭇 생명체를 보호하고 생육하며 순환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우주의 오묘한 운행과 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만일 지구의 자전축이 1°라도 더, 또는 덜 기울어지거나 혹은 태양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고 상상해보면 아찔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침 10시경 출발했기에 오늘은 중도에서 하루를 머물지 않아도 저녁때쯤이면 진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휴게소에 도착하여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아이를 깨워 함께 점심을 들고 나서 다시 출발할 때 딸아이는 미리 준비해온 책을 펼쳐 들고 샤프펜슬로 체크를 해가면서 읽기 시작합니다.
그 지겨운 공부의 사슬에서 놓여날 줄 모르는 우리네 학생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자연주의 교육론 ‘에밀’을 쓴 장 자크 루소가 오늘의 현실을 보면 기가 막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좀 더 자려무나.”
하고 권해 보았지만 내 말은 귀에 걸리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전원교향곡-
어느덧 차는 옥천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읍내를 벗어난 후 무주구천동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면서 아직도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의 나른한 시골길을 아련한 고향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달립니다.
드디어 딸아이가 책을 덮고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립니다. 얼른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주피터교향곡 테이프를 빼고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으로 바꾸어 넣었습니다. 이 곡은 딸아이에겐 아주 익숙한 곡일 겁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여행길에서는 빼놓지 않고 들었던 곡이니까요.
이 곡은 대단히 감미롭고 평화스러우며 낭만적입니다. 이로 인해 베토벤은 고전주의 음악가이면서도 낭만주의 시대를 연 두 시대의 음악가로 꼽히고 있으니까요.
그의 다른 교향곡, 특히 유명한 제5번 운명이나 제3번 에로이카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하고 힘이 넘치는 웅장함이나, 제7번 교향곡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화려함, 그리고 제9번 합창 교향곡의 장중하고도 숭엄한 느낌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곡은 일반적인 교향곡이 대체로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에 비해 독특하게 5개의 악장으로 되어있으며 악장의 구분에 있어서도 1악장과 2악장 이후의 3악장부터 5악장까지는 단절 없이 이어져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곡의 변화와 각 악장에 붙여진 주제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대하는 느낌이드는 정겨운 음악입니다.
제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감정 (유쾌한 감정)
제 2악장 냇가의 정경(정경)
제 3악장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 (시인과 농부)
제 4악장 천둥과 번개 (천둥과 번개)
제 5악장 폭풍우 뒤의 기쁨과 감사 (목동의 노래, 비온 뒤, 기쁨과 감사)
여러분들도 지그시 눈감고 이 음악을 상상해 보십시오. 시골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자연의 소리를 담은 잔잔하고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여러분 앞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깜빡 시골의 풍경과 음악에 취해 내가 좋아하는 베토벤에 잠시 빠져 있었군요. 슬쩍 딸아이의 모습을 살피니 오른손을 무릎 위에 댄 채 손가락으로 음악의 흐름을 따라 장단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각자 그 좋아하는 음악의 취향이 다르겠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길에서 음악(클래식)이 나에게 베풀어준 것은 언제나 넉넉함과 안온(安溫)함 그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거기서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감동과 희열을, 또는 안식과 행복을 느끼기도 했던, 음악은 나의 친구이자 애인이며 깨달음의 스승이었습니다.
-다시 넘는 신풍령-
차는 나제통문(羅濟通門)과 무주구천동을 지나 지난해 아내와 함께 넘었던 신풍령(神風嶺)고개를 다시 넘었습니다. 정상을 지나 경북지역을 굽어보고 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쉬면서 딸아이에게 작년 이맘때 아내와 함께 이 고개를 넘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물론 아내가 속삭이던 은밀한 사랑의 고백을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 비밀스런 사랑의 고백도 언젠가는 써먹을 때가 있을 겁니다. 아내에 대해서는 비장의 카드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에겐 확실히 능구렁이 기질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딸아이도 아내가 겁이 날 정도로 스릴이 있었다는 말에 흥미를 느낀 모양입니다. 돌아올 때 이 길로 온다면 자정쯤에 넘자고 제안을 하는군요.
하지만 그 시간에 이 고개를 넘는다하여도 딸아이를 겁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아내야 가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니셔티브나 헤게모니(주도권)문제로 나를 궁지에 몰기도 하지만 딸아이야 어디 그렇게 합니까?
그리고 부부간의 사랑이란 수평적 관계이니까 서로 미우니 고우니 할 수도 있고 가끔 서로 삐치거나 토라져 아옹다옹하기도 하겠지만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주면 그만이지 받을 생각하면서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아내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많아 겁주면서 사랑을 고백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살아가면서 얻은 이런저런 경험과 지혜로,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항상 신혼 같은 신선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아내의 존재를 존중해 주어야하지만, 때로 능구렁이 같은 정치적인 수완도 부릴 줄 알아야한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뿐이니까요.(진정 정치란 모름지기 가정에서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차 안에서의 대화-
차가 거창을 지나 함양입구에서 산청 쪽으로 접어들 때 딸아이가 갑자기 카오디오의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면서
“아빠, 이게 무슨 곡이야?”
하고 묻습니다. 나도 별다른 의식 없이 듣고 있던 터라 다시 주의 깊게 들어보니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었습니다. 곡명을 알려주었더니 입시준비관계로 피아노를 가까이하지 않아 지금은 잊었지만 중학교 때 자신이 치던 쇼팽의 즉흥환상곡과 비슷한 것 같아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대학이 뭔지 자신이 즐겨 치던 피아노의 곡명을 잊을 정도로 입시의 노예가 되어있는 지금과 같은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피아노 치던 일을 그만두었니?”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지만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공부도 해야 했지만 피아노를 전공할 것도 아니기에 그쯤 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아내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같은 단지의 아파트에 살던 아내의 친구가 자기 딸의 레슨을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개인지도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옆에서 종종 지켜보면서 따라 하기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딸아이의 호기심을 기특해 하면서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가르치는 것 같더니 그 후론 그만둔 모양입니다. 왜 그만뒀느냐고 물으니까 제 자식 가르치기가 남의 자식 가르치기보다 더 힘들어서라고 합니다.
배우기도 어렵지만 가르친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내친김에 진로문제에 대해 당사자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가장 자신 있는 쉬운 길을 생각한다면 일문학 쪽을 선택해야하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점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나는 딸아이의 적성이 인문계보다는 자연계가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2때 문과와 이과로 진로를 결정하는데 수학2 과목이 부담이 되어 문과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 아쉽지만 딸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도록 책임 있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충고를 했을 뿐입니다.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중 한 길밖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되돌릴 수도 없는 길입니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 인생의 갈림길에서 만일 그 때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기에 자신이 정한 길에서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본분이고 어찌 보면 운명일 수도 있겠지요.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내가 가지 않았던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진주에서-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8시경이었습니다. 중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느긋하게 왔기 때문입니다.
제법 호텔규모에 가까운 깨끗한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딸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저녁을 들었습니다. 잠시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내일 가볼 만한 관광지를 체크해 두고는 딸아이를 숙소에 머물게 하고 거래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미 출발할 때부터 예약해두었던 미팅이었고 내일 딸아이를 위해 시간을 배려해야 했으므로 다소 무리인줄 알면서도 밤 2시까지 1차 업무협의를 마쳤습니다.
이튿날 낮에는 촉석루에 들러 논개의 사당도 둘러보고 남강의 푸른 물과 악수도 해보고(딸아이는 발까지 담그기도 했지만) 진양 댐까지 가서 커피숍에서 차도 마시면서...
도중에 잠시(2시간 정도) 볼일을 보고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기에 이미 양해를 구한 대로 딸아이와 함께 참석하여 인사를 나누고...
딸아이는 지루해하지 않고 오히려 평소에 모르던 아빠의 삶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운 듯했습니다.
마지막 업무협의가 남았으므로 먼저 딸아이를 숙소로 데려다주기 위해 돌아서는데 거래처 사장이 무엇인가 딸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책이라도 사보라고 수표 몇 장을 손에 쥐어 준 것입니다.
딸아이의 얼굴이 화사하게 펴진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제 엄마를 닮았을까? 하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내의 얼굴을 그려보았습니다. 아마도 딸아이는 평생 처음으로 그만한 돈을 얻게 된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었을 겁니다.
그 날도 밤 1시를 넘기면서 최종적으로 업무에 관한 협의를 끝냈습니다. 이로써 이곳에 온 공식적인 업무는 모두 끝난 셈입니다.
-삼천포에서-
이튿날에는 아침 일찍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날씨는 아직 맑기는 했으나 이미 바람이 부는 모양새가 예사롭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처럼 예까지 온 이상(실은 작년에도 아내와 같이 왔었습니다만) 꼭 남해의 쪽빛 바다를 보여주고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때부터의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아침 7시가 되기 전부터 움직여서인지 8시가 조금 넘어서 삼천포시가지에 들어가기 전의 전망대가 있는 언덕에 차를 멈추었습니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왔을 때 이곳에서 내려다본 저녁하늘의 낙조와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하지만 지금 아침바다의 모습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듬성듬성한 섬 주위에 떠도는 물새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어느 해안에 머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곳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나그네의 눈길엔 이국적인 모습으로 보여 집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 아래로 내려가 바닷물에 온 몸을 담그고 풍진에 찌든 삶의 묵은 때를 밀려오는 파도의 흰 포말로 말끔히 씻어내고 싶지만 지금은 심상치 않은 날씨에 시간을 다퉈 돌아가야 할 입장이기에 딸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습니다.
삼천포와 사천 중간쯤에 있는 제법 정갈한 식당에서 조금 늦은 아침식사를 들고 가까이 있는 주유소에서 연료도 충분히 채워 넣은 다음 하늘 한번 쳐다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하게 북상 길을 서둘렀습니다.
-태풍권에 들다-
하지만 사천시를 관통하고 진주 시내를 빠져나오는 동안 복잡한 거리와 밀리는 차량들로 인해 적지 않게 시간을 지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진주시를 벗어나 산청군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어느새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빗방울이 자동차의 지붕과 보닛을 때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한낮의 어둠이 산과 강과 대지를 캄캄하게 뒤덮으며 줄기찬 물줄기를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퍼의 움직임이 광란의 몸짓으로 유리에 흐르는 물줄기를 밀어내도 도저히 앞을 보면서 운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할 수 없이 길가의 어느 간이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심술궂은 폭우의 횡포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그렇게 한차례 쏟아지던 폭우가 잠잠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둠이 물러가고 빗방울도 물안개처럼 대기에 녹아있을 뿐 더 이상 자신의 존재가 비(雨)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결국 산청군을 빠져나와 함양군에 접어들면서는 이미 우리가 태풍의 영향권에 들게 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바에는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서둘러 무리를 하다가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기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예 느긋하게 올라가기로 하고 거창으로 가는 길목의 함양 외곽지역에 있는 낯익은 식당(내려가거나 올라갈 때 자주 이용했으니까)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주문했습니다.
-식당에서의 대화-
이 집의 음식 이름이 좀 특이합니다. ‘암소한마리’! 쇠고기와 우거지를 함께 넣어 끓인 국밥인데 담백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있어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입이 짧은 내가 먹기에도 부담이 없었으므로 이곳에 오면 늘 이 음식을 주문하곤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먹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음식을 잘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이름이 ‘암소한마리’인 것에 대해 주인은 소(牛)의 여러 부위 중, 맛있는 몇 곳의 부위를 골고루 넣어 만들었으므로 한 부분만이 아닌 한 마리의 고기가 들어있는 셈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조금(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비약된 표현 같지만 그래도 식대를 받을 때 소 한 마리 값을 요구하지는 않으니 트집을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밖에는 안개구름이 낮게 드리운 채, 소리 없는 가랑비만 촉촉이 내리고 있습니다. 간간이 바람이 일어 조용히 내리는 실가랑비를 희롱하듯 이리저리 흩뿌립니다.
식사를 하면서 다시 딸아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만일 일문학을 전공할거면 작가가 되고 싶은가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아직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수가 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공부를 해보면서 생각할 문제라고 합니다. 그럼 일문학을 전공하여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딸아이는 계속되는 질문에 조금 난감해 합니다. 아직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가치관의 정립이 이루어져있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일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것도 학교에서의 일어 성적이 고교 3년 동안 줄곧 전교 1위였기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이지 ‘오직 이 길이야!’ 하는 깨달음을 통한 신념의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행복입니까? 사랑입니까? 돈입니까?
어느 행복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젊은 나이에 병원에서 암으로 아쉬운 생을 마감한다고 하면 진정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건강입니까?
만일 어느 건강한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다가 그가 운영하던 회사가 뜻하지 않게 부도가 나서 망하게 된다면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은 또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인생이란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그 가치기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같은 가치기준이라 하더라도 역시 사람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해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어떤 이는 하루에 몇 만 원 정도의 수입에 감사해하고 만족할 수 있으며 어떤 이는 하루에 몇 억 원을 벌어도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기도 할 것입니다.
딸아이가 인생의 참 의미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딸아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물정 모른 채 온실의 화초처럼 곱게만 키운 나의 잘못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네 교육풍토가 배우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의식을 심어주는데 충실하기보다는 수능점수나 대학진학률에 교육의 초점을 두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만 가치의식이 없다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폭풍우 전의 정경-
식사를 끝내고 다시 차에 오를 때는 신기하게도 비도 그치고 멀고 가까운 산자락마다 안개구름이 걷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간혹 두꺼운 구름사이를 뚫고 내리 뻗치는 햇살이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신비한 모습으로 곳곳에 서있습니다.
거창을 지나 신풍령을 되넘기까지 우리는 운무의 용오름과 멀고 가까운 산과 들의 구름에 쌓인 그림 같은 선경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자연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대해 거듭거듭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더욱이 비 온 뒤의 말끔하고도 깨끗한 자연의 모습은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웠겠습니까? 딸아이도 탄성을 연발하며 이번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가 무주구천동 근처를 빠져나올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태풍권 안에 들었으면서도 큰 비바람의 영향이 없었던 그동안의 고요와 평화는 바로 우리가 태풍의 눈, 그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평화는 깨지고 우리는 정말 태풍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천둥과 번개-
무주군 설천면에서 금산방향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면서 전형적인 농촌의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을 때 딸아이가 먼저 앞쪽 들판의 끝머리부근에 내리꽂히는 번개를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아빠, 저것 좀 봐요!”
나는 밤중에 천둥치는 소리를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제치고 밖을 내다볼 정도로 번개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지금 번개가 치는 모습을 정면에서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니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겠지요.
딸아이도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않습니다.
“아빠, 또 쳤어요!”
“아빠, 저기요!”
그런데 그게 점점 가까이에서 번쩍인다 싶더니 순간적으로 바로 우리가 가는 길 앞에 번쩍! 하고 하늘을 쪼개면서 땅이 찢어지는 듯 엄청난 폭음으로 고막을 때립니다. 순간! 좀처럼 겁이 없던 나도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길옆 농가의 빈터에 차를 세우고 말았습니다.
설마 달리는 자동차에 벼락이 떨어지기야 하겠습니까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제우스신이 마음만 먹으면 능히 우리가 탄 차를 박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번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겁 없이 자연의 조화를 가볍게 보고 있는 오만함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봐야 할까요? 이 순간은 이성과 감성의 우열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듯 머리는 텅 빈 것처럼 멍한데 가슴은 증기기관의 터빈을 돌리는 듯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정(父情)은 어쩔 수 없었던지 경황 중에도 딸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딸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오히려 딸아이가 더 침착했을 겁니다) 이제 앞으로 쏟아질 폭우를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초라해진 이성을 추스르면서 천천히 자동차의 시동 스위치를 다시 돌렸습니다.
-풍우를 헤치며-
드디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종내 하늘이 구멍 난 듯 사나운 물줄기를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금산과 영동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영동방향으로 접어들자 퍼붓는 폭우에 바람까지 가세해 태풍의 위력을 한껏 과시하려는 듯합니다.
비와 바람이 줄기차게 물줄기를 쏟아 부으면서 차체를 흔들어대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운행할 수가 없어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기세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 중 집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오므로 이제부터는 밤길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진주에서 고속도로를 탈걸...’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어느새 저녁때가 다되어 어디선가 식사를 해야 할 텐데 식당은 보이지 않고 세찬 비바람은 계속 몰아칩니다. 차는 시속 30km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멈추어 서기를 반복합니다. 어떤 때는 30분 이상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올라가자던 생각조차 후회가 됩니다. 영동군에서 옥천군으로 갈라지는 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 식당이 보이기에 차를 세우고 들어서려니 문이 잠겨있습니다. 아이고! 설상가상으로 저녁도 굶어야할 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속도로로 접어들 수만 있다면 집에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조등을 켜도 빛을 삼키는 어둠과 빗줄기로 인해 앞길의 상황을 분별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길도 이제는 평탄한 들길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산길이거나 휘감아 굽이진 계곡을 지나는 위험한 길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우리보다 앞선 태풍이 휩쓸고 간 흔적으로 여기저기 길가에 쓰러져 누운 나무들과 무너져 내린 흙더미와 돌덩이들을 피해 곡예운전을 하면서 가야 합니다.
번개에 놀란 뒤부터 이렇게 악전고투하기까지 벌써 6시간이 넘었습니다. 지겹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옥천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행히 비바람의 기세가 한풀 꺾여 빗줄기도 아까처럼 드세지는 않고 바람도 그다지 세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이미 계곡과 시내를 거칠게 넘쳐흐르며 건너야할 교량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긴장과 피로로 몸은 지쳐있고 배는 고프고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이틀 동안 수면도 충분히 취하지 못했던 관계로 이제는 졸음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험악한 조건에서 여행을 하는 것은 나로서도 처음입니다. 내일 딸아이가 학교에 가야할 일만 없다면 정말이지 아무데서나 쉬었다 갔을 것입니다.
딸아이도 긴장이 되는 모양입니다. 길가의 도로 표지판이나 이정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며 가끔,
“아빠, 졸지 마!”
하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또 카오디오의 테이프를 갈아 끼우기도 하고 낮에 본 인상적인 모습들을 이야기해 주면서 내가 긴장을 풀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모전여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 못지않게 운전석 옆자리의 역할을 잘도 해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옥천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오는 동안 내내 딸아이에게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휴게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최면을 걸다시피 이야기하면서 왔는데 정작 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는 내가 최면에 걸렸는지 긴장이 풀리면서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져옵니다.
불과 30~40분 정도의 거리인 죽암휴게소까지가 어찌 그리 멀던지... 딸아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주 경고합니다. 때로는 팔을 잡고 흔들기도 하면서...
-여행을 마치고-
비몽사몽, 어찌 어찌해서 죽암휴게소에 이르니 휴게소 안내 글씨가 가물가물합니다. 곤죽이 된 몸으로 차에서 내리니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었습니다.
다른 식당이나 매장은 모두 문을 닫았고 2층에 있는 국수만 파는 식당에서 가락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딸아이도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 식구는 종종 오밤중에 만남의 광장으로 가서 가락국수를 사먹고 돌아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지겹도록 그침 없이 내리는 빗속을 헤치며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도착했을 때는 3시가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딸과 함께 폭풍우를 뚫고 다녀온 고3 추억 만들기의 여름 여행은 이렇게 끝나고 우리 부녀의 가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아름다운 기대, 그리고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이 꿈나무처럼 자라고 있겠지요.
폭풍우 속의 여행! 어쩌면 인생의 길도 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어려움의 상황을 극복하고 저만치의 거리에서 뒤돌아보면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기억들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돋보이게 해주는 귀중한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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