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한잔의 향기>
글 / 김 의중
결혼 후 얼마의 세월이 흘러 명동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회사가 입주해있는 제일백화점 건물의 4층은 넓은 라운지의 휴식공간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쪽 코너에 제과점과 새로 생긴 커피전문점이 있었다. 대개의 직장생활이 그렇듯 오후 4시경이면 다소 업무능률이 떨어지면서 나른해지게 마련인데 이 시간이 되면 여직원들도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 밖으로 나가 간단한 스낵류나 국수 같은 것으로 간식을 하고 돌아오는 게 일종의 묵인된 관례였다.
내 경우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나 조금 격식을 갖춰 대접할 손님이 오시는 경우 또는 같은 부서장들과 분위기를 바꾸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때 멀리 갈 것 없이 같은 건물에 있는 이 커피숍에 들르곤 했는데 어떤 때는 머리를 식힐 겸 혼자 내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명동은 금융시장의 중심지였고 유행의 근원지였다. 피자도 당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고 원두커피의 바람도 그때부터 불기 시작했던 때였다.
하루에 한번 이곳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일과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자주 내려가다 보니 자연 능숙하게 원두커피를 끓여내는 종업원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내가 먼저 주문하지 않아도
“오늘은 불루마운틴이나 킬리만자로로 드시지요.”
하거나
“자메이카나 산토스 드셔 보실래요?”
하고 권하곤 했다.
그러면서 각각의 원두 알갱이를 꺼내 보이며 커피의 종류와 맛의 차이에 대해 꽤나 자세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원두의 종(種)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기도 하지만 볶는 과정이 커피의 질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과 아무리 잘 볶아진 커피라 하더라도 수입해서 들여오는 동안 보관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제 맛과 향이 크게 변질될 수 있다는 등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얽힌 에피소드들을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종업원 덕에 나는 커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커피를 마실 때 예사롭지 않게 맛이나 향을 음미하면서 때로는 인스턴트커피를 탈 경우에도 나름대로 브랜드가 다른 종류를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타 마셔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
덕분에 위가 약한 내가 한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로부터 커피, 콜라, 박카스를 마시지 말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을 편하게 믿고 있는 탓에 경고를 무시하고 커피만큼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보는 데서 요령껏 얻어 마시기도 했다.
흔히 남들이 말하는 카페인 중독이나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삶의 멋과 기호(嗜好)에 대한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집에서도 레귤러 서너 종류와 인스턴트 대여섯 종류는 기본으로 갖춰놓고 있으나 나이가 들어서인지 절차가 귀찮아 예전처럼 멋을 내며 호들갑스럽게 타 마시지는 않는다.
커피의 기원은 약 천 오백년 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그보다 5백년 뒤인 10세기경, 에티오피아에서 카파(Kaffa)라고 불리던 나무열매를 약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지역에서 기호식품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의 터키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면서 대중적인 음료로써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890년경부터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되어지며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896년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에 아관파천(俄館播遷) 하였을 때 처음으로 커피를 음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서구 씨가 쓴 ‘세시기(歲時記)’에는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에 커피를 파는 다방이 성행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커피 원두를 갈아 끓인 후 필터로 여과시켜 각설탕을 넣어 마셨으며 본격적인 커피 문화는 6.25전란 이후 인스턴트커피가 들어오면서 서민들의 기호식품으로 보편화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시 원두커피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고급커피의 문화는 경제성장이 제 궤도에 이른 80년대 초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커피의 종자(種子)는 약 40종이 있지만 재배하는 것은 크게 아라비카종, 로부스타종(콩고종), 리베리카종, 엑셀사종의 4종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주종(主種)은 전체 커피나무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아라비카종이며 로부스타종은 약 9%정도로 재배수량은 적으나 향(香)이 강한 강점이 있어 인스턴트 제조용 원두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나머지는 시험재배용으로 육종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커피에 함유된 성분으로는 카페인과 카페린, 타닌이 있는데 카페인과 카페린은 커피의 맛을 결정짓는 성분으로 함유량은 약 1.3% 정도이다. 뜨거운 물에 잘 녹으며 상쾌한 자극이 있고 흥분작용을 하므로 이 때문에 커피가 몸에 유익하다거나 해롭다는 논쟁이 끊이지를 않는다.
타닌은 쓴맛 성분으로 하급 품일수록 함유량이 많다. 커피 향은 생 원두를 볶는 과정에서 생기는 카페올과 에테르성의 것으로 휘발성이 있어 분쇄 후 그냥 놔두면 약 2주 만에 없어진다.
커피는 볶는 과정에서 그 맛과 질이 결정되는데 볶는 과정을 로스팅(Roasting) 또는 배전(焙畑)이라고 한다. 대체로 4급 8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약한 급의 약배전 커피는 신맛이 강한 ‘아메리칸’으로 영국과 미국이 선호하며 레귤러커피의 원료가 되는 중배전 ‘마일드’ 로스팅은 독일과 일본이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강배전인 ‘유러피안’은 스트레이트나 아이스커피용으로 애용되고 있으며 프랑스와 이태리, 중남미 국가에서 선호하고 있다. 가장 진한 커피는 ‘에스프레소’인데 향이 거의 없으며 쓴맛이 강해 우유를 넣어 만든 카푸치노, 생크림을 넣어 만든 비엔나커피 등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 마시고 있기도 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맛을 중시하는 타입이며 다른 하나는 향을 중시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맛의 기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대로 로스팅 방식이 각각 다르기에 어느 것이 최고급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가장 잘 알려진 최고급 브랜드는 블루마운틴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블루마운틴은 원래 자메이카에 있는 산 이름이지만 여기서 재배되는 커피가 해발 1,000m ~ 1,800m에 이르는 고산지 이슬을 맞고 자라면서 독특한 재배법과 농부들의 정성어린 손질로 명성을 얻으면서 고유명사화 한 것이다. 브라질의 산토스, 아라비아의 모카는 각각 산지(産地)나 집하지(集荷地)의 지명을 딴 브랜드이며 자메이카,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은 아예 나라이름이 브랜드가 된 경우이다.
향을 중시하는 유명브랜드는 헤이즐넛과 아이리쉬가 있는데 이는 순수 커피 향이 아니라 헤이즐넛 향(하와이산)이나 아일랜드 위스키 향 또는 크림 향을 첨가한 가공커피이고 순수한 커피 향을 중시하는 브랜드는 주로 약배전 커피인 아메리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마실 때 향이나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진정한 멋과 운치는 다른데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냥 맨숭맨숭 마시는 커피보다 음악이 곁들인 한 잔의 커피가 훨씬 더 분위기가 있을 것이며 글을 쓰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할 때 손을 뻗어 잡아보는 한 잔의 커피는 얼마나 멋과 운치가 있는 모습이겠는가?
혼자만의 고독한 명상도 곁에 커피한잔이 놓여있다면 한층 사색의 깊이를 더해주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연인과의 대화에서도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곳에 한 잔의 짙은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분위기 있는 공간이라면 사랑의 성패와 상관없이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과 장소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리라. 다정한 벗들과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나누는 커피한잔! 부부끼리 가벼운 드라이브 길에 한적한 카페에서 넉넉함으로 나누는 커피한잔의 여유는 얼마나 멋진 낭만이겠는가?
깊어 가는 이 가을날!
낙엽을 밟으며 고독한 사색의 길을 한없이 걸어보고 싶은 계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헤아리거나 스산한 바람에 비인 가슴이 공허한 외로움으로 분분히 흩날릴 때, 우리는 잊혀 진 아득한 기억들로부터 아픈 상념을 되살리며 마음에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을 불러오는 계절병을 앓게 된다.
오늘도 밤은 적막 속에 속절없이 깊어 가는데 나는 지금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고국의 가을을 그리며 CD 몇 장을 골라 놓고 그 중 '타이스의 명상곡'을 플레이어에 넣는다. 이 곡이 끝나면 베토벤의 ‘열정’을 들으리라! 달빛도 없지만 그 ‘열정’에 몸을 담그고 외로움도 그리움도 모두 묻으리라. 그리고 흐느끼리라.
음악이 흐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맥없는 손길로 한 잔의 커피를 타서 창가에 선 채 그 향기를 코끝과 가슴 깊숙함으로 음미해본다. 지금 여기엔 가을이 없어도 나는 이 한 잔의 커피에 고국의 가을을 담아 낙엽 빛깔의 찰랑이는 슬픔을 타는 가슴으로 마시고 있다.
04 Oct, 2002
HONG KONG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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