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수필

작가의 수필 <논리를 넘어서는 대화>

필그림(pilgrim) 2007. 6. 7. 23:58

<논리(論理)를 넘어서는 대화(對話)>

글 / 김 의중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그의 저서인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첫머리에서 철학을 과학, 신학과 함께 인류의 문명을 지탱해 온 세 개의 기둥으로 설명하면서 과학은 사물을 논리적인 것으로 다루며 신학은 명확한 지식으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연역적인 추론(Dogma)으로 다루나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해 논리를 초월하는 사색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 과학과 마찬가지로 비논리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입장을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과학이 제공하는 합리적인 편의성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때로는 논리적인 것을 초월하는데서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의 내용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인용했을 뿐이다.

총각시절에 아끼는 후배인 K군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 고등학교 국어교사(현재 C 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학교 가까이에 자취방을 얻어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총각선생 두 분과 함께 셋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종종 일과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오후에 찾아가면 함께 탁구도 치고 바둑도 두고 저녁식사 후엔 근처 야산으로 산책도 나가 이런 저런 인생의 이야기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시골이 고향인 그의 집안은 많은 형제들이 있었으나 그때까지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나의 권유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본인이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일요일이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나가곤 했었는데 하루는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가지고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모두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는데 K군의 수척한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안쓰러워하시면서

"얘, 너 요즘 교회에 나간다면서? 우리 집안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네가 교회에 나가니까 귀신이 씌어서 감기가 들은 거야. 에그 몸이 여윈 것 좀 봐."

하셨다. 이 말을 들은 K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에이 어머니도...."

하면서 한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방안으로 모셔 들였다.

그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보면서 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어떤 대화에 있어서는 논리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감동하게 하는 대화는 해박한 지식이나 논리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일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오신 시대는 그런 시대였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은 아직도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컴퓨터 키보드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며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본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전통인습에 따라 집안 살림을 꾸려가며 자녀들 공부하는 일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삶을 가져볼 생각조차 못하셨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빅뱅이론이나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클래식음악을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는데 아무런 지장 없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아들 건강을 염려하면서 혹시나 아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조상들을 노하게 한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무지와 비논리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K군은 어머니의 말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공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소모적인 논쟁의 소지를 피하면서도 어머니가 염려해 주시는 마음의 본뜻을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대화 방법을 잘 제시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손히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고, 남의 말을 가로막지 말며, 반론을 제기할 땐 상대방이 제시한 말을 무시하지 말고(말씀하시는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아마 이러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을 잘 정리하여 알아듣기 쉽게 말하며, 대화 도중 언성을 높이거나 길게 발언하지 말며,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며 대화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예절을 갖추어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K군이 어머니와 주고받는 이야기처럼 정감이 있고 감동을 주는 대화는 아니다. 물론 논리가 정연한 대화는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지며 말하는 이의 지적, 인격적 수준을 돋보이게 하며 감탄을 자아내기도 할 것이다. 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을 조리 있게 잘 한다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변화된 물질문명의 사회에서는 인간적인 이야기,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쉽게 느껴지고 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방언(외국어)을 유창하게 하고 천사와 같은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탄복이 절로 나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진정 우리가 남과 나누는 대화에서 격식을 차리는 의례적인 말보다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밈없이 대화한다면 다른 어떤 논리적인 웅변이나 설득보다도 더 듣는 이의 마음을 감동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이 만추의 가을에 그런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낙엽을 밟으며 평범한 이야기나마 마음을 담아 따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