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 사랑방

동인문학 사랑방 <기차를 타다>

필그림(pilgrim) 2007. 6. 12. 21:50

<기차를 타다>

글 / 최 은지

기차를 탔다.
제법 푸르러진 풀잎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살랑 불어오는 바
람이 더 없이 청명한 날.
가시도 없는 언어 와 칼보다 날카로운 펜 끝으로  찔려버린 상처난
가슴속에는 우울함이 가득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발 딛을 틈이 없을 만큼 플랫포음이 분주하다. 좌석이 정해지
지 않은 기차표 한 장을 사서 맨 마지막 칸에 몸을 싣었다. 내 목
적지를 향해 기차가 앞으로 나아갈 수록 뒷걸음치는 레일을 본다.

내가 가지 않아도 떠 밀려가는 시간처럼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때
가 되면 가고 오는 인생 길. 엇갈림의 만나고 해어짐이 실타래처럼
엉킨 길 위에 나를 세웠다. 난 서 있다. 내 생각의 미로 같은 길.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손 흔드는 길을 지나 풀잎 싱그럽게 돋
아나는 기찻길, 레일의 받침 목처럼 내가 믿고 있던 것들. 그 믿음
이 나의 폐부를 찌르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가슴을 내 놓으라
한다. 피를 흘리는 고통보다 삼켜야 하는 아픔들 말이 있어도 할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었도 볼 수 없고, 머리
와 가슴이 있어도 느낄 수 없는 자폐가 된다.

잃어 버린 자신감, 우물 속에 갇힌 사유의 부끄러움으로 어지럽게
엇갈린 철로를 본다. 제 갈길 용케도 잃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레일. 그 무심한 길 위에 쏟아지는 햇살은 저리도 화려한
데....내 가슴속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만으로 인하여 밝음만큼
그림자가 짙다. 세상사 어디 하루 이틀 살까마는 왜 이리 답답한
것인지....생각할 수록 얼굴 화끈거림과 부끄러움으로 온다.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길처럼 넘지 못하는 문단의 벽이었을까?

내 마음의 무게는 아랑곳없이 새털처럼 가벼운 햇살은 철길 위에
쏟아지고, 생명들을 불러내는 가쁜 호흡을 한다. 창 밖을 응시하던
눈길을 돌려 인간사 축소판 같은 무수한 군상들의 모습을 본다. 고
소한 참기름, 들기름 보따리 보따리 쌓여진 정을 들고 자식을 찾는
노모의 정성이 있고, 중후한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노신사도 있다.
다양한 삶이 있는 곳.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지금 이 기차에 올
라 운명을 함께 한다. 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타고.. 철로 옆 기
차가 지날 때마다 일어섰다 눕기를 반복하며 그래도 꺾이지 않는
꿈을 안고 이제 푸른 싹을 키워내는 풀들을 본다. 눈물이 나려 한
다, 함께 뒹굴며 살아가는 삶. 서로의 자리를 배려해 줄 수 있는 그
런 마음이었으면 좋았으련만...내 안에 작게 자리하던 희망이 꺾여
버렸다.

작금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할 수록 내 설익은 모습만 보인 것 같아
서 얼굴이 붉혀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언제나 존재의 위협을 느
끼면서도 당당하게 강하게  피어나는 풀들, 그 위험 속에서도 꽃
피울 꿈을 꺽지 않고 살아가는 낮은 삶. 저 풀들처럼 나도 결코 높
은 곳의 화려함을 원하지 않았는데......아주 낮은 곳. 낮아져서 자유
로운 삶을 살고 싶었고, 마음가는 대로 펜이 가는 대로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그 방식에도 틀이 있고, 격이 있고, 뛰어 넘어야 하
는 벽이 있음에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만이 내재되어 있었
던 것은 아닌가 해서 참회의 눈물 흘려야 하는 아릿한 아픔의 봄.
푸른 생명으로 피어나는 화사한 봄이지만 내 마음은 겨울 찬바람에
서성이는 봄이다.



이 글은 최 은지 작가가 제 서재 '손님문학'에 남긴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