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받은 글)

서신(받은 글) 008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필그림(pilgrim) 2007. 6. 10. 12:21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비 소식이 들리면 무엇보다 먼저 작년 8월말에 발생한 미증유의 대홍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위 산천은 아직 복구가 한참 미진한 상태임으로 후속상황이 다시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급한 대로 농사를 먼저 지을 수 있도록 농토복구작업이 선행되다보니 일손가 시간이 모자랐던 게지요, 하지만 하늘이 하시는 일 완전한 대비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럴지언정 가능한 대비는 도리일 것입니다.
이에 저도 대피를 막 마치고 들어왔습니다. 다른 이들이 복구에 열을 올리지만 저로서 할 수 있는 대비란 뻔한 일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산 마을에서의 성과물, 단행본 10여권 분량의 원고를 대피시키는 일이 그의 첫 번째일 뿐입니다.
디스켓에 복사해 트럭에 넣은 다음 자동차를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떼어놓았습니다. 오솔길을 돌아 밤나무동산 뒤편, 도로에서 가까운 나름대로 안정장소입니다.
트럭을 대피시키는 사실상의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반딧불이의 입장을 고려함입니다. 반딧불이는 경유를 사용하는 디젤엔진의 배기가스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답니다. 편함을 이유로 당연히 집 앞 뜨락에까지 트럭을 늘 가까이 몰고 들어오긴 하지만, 낮에 잠깐이라도 엔진을 걸어놓으면 야밤에 그의 대가가 여지없이 지불된답니다. 반딧불이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마는 게지요.
반딧불이에게 경유연료 배기가스는 독가스와 같다는 사실, 한번 충격을 받으면 이틀 뒤에야 겨우 다시 나타나 준다는 사실을 여러 해 동안의 경험으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아예 원고안전과 겸해 멀찌감치 대피시켜 두었습니다. 이젠 두루 안심이 됩니다.
이처럼 산골짜기의 여름밤은 독특함이 짙으며 운치도 별나답니다. 나름대로의 질서와 삶의 편린이 발생하고말고요, 바깥 세상의 '사스' 열풍 대신이라면 모양은 야간 다를지라도 함께 가는 염려이겠습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말씀입니다.
(선배님은 꼭 기억해주십시오, 제 원고는 파란색 1톤 고물트럭 중간의자 등뒤 포켓에 디스켓 두 장으로 보관되어있습니다. 만일 이곳에 무슨 일이 발생하걸랑 그것만은 반드시 되살려주셔야 한답니다.)
말인즉슨 무슨 유언처럼 처절해 보이지만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작년 그토록 막심한 사태에도 끄떡없었던 이곳 장소랍니다. 다만 준비성 있는 신중한 대책인즉 함께 웃으며 넘어가면 그저 좋을 뿐이겠습니다. (디스켓 두 장입니다, 두-우 장.)

'사스'가 제 풀을 꺾어주었기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듯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매미도 징그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뜨락엔 활짝 꽃핀 개망초들이 서로 키 재길 하고있습니다.
선배님의 현실을 무작정 도외시 한 채, 가볍고 예쁜 여름 소식 한편만 전해드립니다. (학마을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