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지식의 샘터

학문과 지식의 샘터 <권학문(勸學文)>

필그림(pilgrim) 2007. 6. 6. 12:43

 

(권학문: 勸學文)


확고하면서도 의젓한 민영이의 글 잘 보았습니다.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감성적 치우침 없는 문장력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중학생의 의식수준이 이 정도라면 미래는 오로지 희망일 뿐입니다. 명징(明澄)한 봄날의 소담스런 햇살을 대하는 심정으로 시종 마음 뿌듯했답니다.


무릇 학문이란 진리를 탐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추구해 가는 작업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왜? 라는 명제가 바로 학문이 품고 있는 궁극(窮極)의 집점이지요, (학문의 의미)


자연과학자들은 '왜?'를 사물의 이치, 물성의 원형질 추구에 두고 있으며, 인문과학자들은 '왜?'를 사물의 이유와 물성의 가치확립에 두고 있어서 이의 두 바퀴가 함께 튼실한 학문의 근저를 이루어 나간답니다. 이를 기반으로 많은 응용력을 발동, 진전되는 문화를 창조함으로서 인류의 삶과 행복을 보장해 나간답니다. (학문의 이유)


다만 호기심을 생명으로 여기는 '왜?'에도 조심스러움이 없지 않답니다. 즉 한계를 모르는 호기심 때문에 학문이 선용만이 아니라 악용될 소지도 있음을 우린 역사와 현실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라는 학문의 두 바퀴에 균형이 맞지 않을 경우 빚어지는 위험성이랍니다. 비단 인류만이 아니라 자연계 모두의 공동의 미래를 염두에 둘 때 항상 경계해야할 내용이며, 선(善)과 호기심 사이의 절묘한 타협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답니다. (학문의 자세)


자연과학자들은 진리에 아낌없이 목숨을 걸고 있으며, 진(眞)

인문과학자들은 선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선(善)

양자의 결합에 의해 탄생되는 종국적인 결과가 바로 미(美)에로 귀착되어야 하고 그것은 만류(萬類) 공동의 것이어야 한답니다. (학문의 목적)


진리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자들은 선의 가치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고, 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과학자들은 진리의 엄중함을 언제나 상기해야 한답니다. 이를 조화 또는 균형이라 하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모든 학문은 위험한 독선으로 흐르게 됩니다. (학문의 위험성)


많은 배움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어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배움이 아닌 것이고, 진정으로 배워서 깨달은 사람이라면 행동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자의 자세)


인류의 세대물림은 의외로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비할 수 없이 탁월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그 중에서도 좀 더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인류의 미래 나아가 지구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우린 위인 또는 영웅이라 부릅니다.

아울러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소영웅들에 의해 문화가 만들어지고 인류사회 전체가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사회에도 영웅, 소영웅, 대중이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영웅은 역사를 만들고, 소영웅은 역사를 발전시키고, 대중은 그를 즐기며 따릅니다.

행위적으로 참 영웅은 지구전체의 질서를 추구하고, 소영웅은 인간사회의 질서를 추구하고, 대중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노력합니다.

예전처럼 운명이란 사슬로 인간의 자격이 결정되어있진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가능성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여하에 달려있습니다.

내 운명은 물론이고 우리민족, 나아가 인류의 미래가 민영이의 두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민영이는 어느 쪽 길을 따를 것입니까?

 

-학마을-



* 민영이라는 학생이 올린 글에 답한 학마을 님의 글.

진선미에 대한 가치관의 인용과 해석에 대해서 제우스는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이 글을 쓰신 학마을 님의 논리적 서술이 매우 훌륭할뿐만 아니라 권학문에 국한된 것이라 새삼 가치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숙현 군이 진선미에 대한 가치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독일의 철학자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의 이론을 참조해보기 바랍니다. 
-제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