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마트소설 <어떤 고백>

필그림(pilgrim) 2025. 1. 11. 14:35

어떤 고백(告白)

 

 

나는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침마다 나가는 공원의 산책길에서 만난 사이이지만 난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모릅니다. 다만 내가 이쪽 사잇길을 걸을 때면 그는 저쪽 보히니어(紫荊花-Bauhinia) 나무 사이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그 모습을 잠시만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여 나는 매일 아침 공원의 산책길을 서성입니다. 어떤 때는 황홀하게도 눈빛이 마주칠 때도 있습니다. 설레는 마음, 뛰는 가슴을 감춘 채 짐짓 무관심한 듯 모른척하며 그의 곁을 지나오나 고개 돌려 다시 돌아보고픈 마음을 억누르기 어렵습니다. 가끔 용기를 내어 뒤돌아볼 경우도 있으나 행여 그 맑고 청순한 마음에 뜨거운 나의 열정을 들키기라도 할세라, 혹 수줍음에 눈을 흘기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지나 않을까 하여 애써 그의 앞에 서면 발걸음은 물론 숨쉬기조차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이러한 열병을 앓고 있음을 아내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다 함께 나선 산책길에서 잠시 내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을 때 아내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살펴도 아무것도 아닌 양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리곤 합니다.

 

물론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 역시 나에 대한 신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결혼 이후 30년에 이르도록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는 아픔을 준 일이 없이 지내왔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서로에게 편한 존재가 되자고 다짐한 이래 폭력은 물론, 상스럽고 저속한 언어를 사용하여 다투거나 서로의 약점을 들춰내어 상대를 깎아내린 일이 없습니다.

간혹 아내로부터 불만스러운 표정을 발견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의 확인을 위한 여성적인 심리의 어쩔 수 없는 발로일 뿐 대놓고 불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들입니다. 가령 아내가 내게 묻습니다.

여보 당신 나 사랑해?”

그건 또 왜 물어?”

아니 그냥, 하여튼 사랑해?”

잘 알잖아?”

근데 왜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이 경우 예외 없이 다소 샐쭉해지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란 신성한 행위이며 그 언어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실해야 할 책임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가 굳이 그 말을 꼭 들어야겠다고 고집했을 때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일랜드의 전설에 나오는 가시나무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는 일생에 단 한 번만 운대. 죽기 직전에 말이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는 순간 가시나무의 긴 가시에 찔려 슬픈 울음을 울고 죽는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애절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대. 사랑도 그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쪽이든 임종을 하는 사람이 자기 짝꿍의 손을 잡고 나 평생토록 당신을 사랑했어. 그래서 행복했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사랑한다는 고백이 가시나무 새의 울음처럼 평생에 단 한 번만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며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진지해지지 않겠어?”

결국 내가 그토록 아끼고 귀하게 여기던 사랑이란 단어를 아내로부터 보호하고 지키려는 노력은 나이 40이 지나면서부터 덧없이 허물어져 이제는 시간의 토막에 새겨놓은 녹음테이프의 목소리처럼 어느 때나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듯 헤프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습관이 되니 오히려 하지 않으면 아내의 눈치가 보이며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은 정서적인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자들이란 그렇게 여자, 특히 아내에 의해 길들어지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아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의 열병임은 확실합니다. 나는 매일 그를 만나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으며, 손이라도 내밀어 그의 일부라도 만져보고 싶고 그와의 어떤 충분한 감정의 교류가 있기를 몹시 열망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나의 감정을 언젠가는 아내도 눈치를 채겠지요.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는 고백할 만한 내용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가 열정을 품은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를 않았으니까요. 데이트는 물론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일도 없으며 상대방으로부터 나를 좋아한다는 어떤 표현이나 표정을 확인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로서의 상황은 내 쪽에서의 지극히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할 뿐이며 황혼의 나이에 새삼스럽게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이 쑥스러워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아니 부부간에 있어서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가 몇이나 될까요? 또 그것이 항상 옳고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미덕일까요? 특별히 말 못 할 큰 비밀은 아니더라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소한 비밀 하나쯤 또는 그 이상 얼마든지 누구나 가지고 사는 게 보통이 아닐까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미주알고주알 가림 없이 상대에게 자신과 관련된 일들을 모두 알리는 것이 더 경박해 보이거나 귀찮거나 부담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비밀은 때에 따라서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상대에 대해 개인적인 비밀을 인정하는 것은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성한 자기 영역에 대한 존중이며 인격적인 배려일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상대에 대해 이미 알 것 다 알아버린다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다음부터는 아예 알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상대에 관한 관심이 고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할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됩니다.

상대에 대해 흥미나 관심이 없다는 것, 이것은 비극입니다. 상대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어느 구석에서도 상큼하고 풋풋한 첫사랑과 같은 신선함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에서조차 사랑은 어디로 가고 행위만 남아 있는 꼴이 될 것입니다.

정직(正直)이 최선이라는 도덕적 명제에 이의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이 경우 정직의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리 금실(琴瑟)이 좋고 이해심이 풍부한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전혀 비밀이 없다는 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사소한 비밀은 부부 사이의 애정을 더욱 두터이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오래전 일이기는 합니다만 내가 아이들에게 정해진 용돈 이외에 별도의 보너스를 아내 몰래 주었을 때 아이들의 싱글벙글한 표정에서 아내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는 그 천부적인 재능으로 셜록홈즈 뺨치는 날카로운 추리를 해냅니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맑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그칩니다.

당신 애들에게 가욋돈 주었지요?”

이때 나는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실토합니다.

정말 당신은 못 말려. 근데 얼마나 주었어요?”

만일 여기서 지고지선(至高至善)정직을 내세워 아니 부부 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에 휘말려 이실직고하면 아이들의 원망 어린 눈망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아빠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게다가 인기와 존경과 사랑을 얻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한 돈도 전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내로부터의 어떠한 회유와 협박과 눈물 어린 호소가 있더라도 이 단계에서는 비밀을 고수합니다.

그건 비밀이야. 말 안 할래.”

일단 내 입에서 이러한 선언이 떨어지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다시 생기가 돌고 아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쯤에서 물러서게 됩니다. 그러나 베게 밑 송사라는 말이 있듯이 그날 밤 침실에서 아내가 분위기를 바꾸어 다정한 목소리로 그 문제를 다시 물어온다면 굳이 비밀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일 아내가 이런 일을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면 글자 그대로 아이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공고히 하는 은밀한 비밀로 끝날 것이며 놀라운 아내의 직관력과 추리력에 의해 탄로가 난다고 하더라도 인정되는 개인적인 비밀 선언으로 이처럼 시간의 유예를 얻은 다음 나중에 고해성사하듯 고백한다면 아이들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비밀의 유효기간을 적절히 둘러댈 수 있는 점에서, 그리고 아내에 대해서는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비밀이라도 감추지 않는 가장 가까운 자기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양쪽으로부터 깊은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어떤 대상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내에게 끝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드디어 나는 아내에게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라구나(Laguna)공원의 동편에서 떠오른 햇살이 밤사이에 내린 꽃잎의 이슬 위에 첫 입맞춤을 하는 시간, 나는 아내와 함께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아내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날 아침에 나는 아내에게 그동안 내가 홀딱 반한 상대가 있었고 오늘 그 상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고백했으니까요.

공원의 중심부에서부터 북쪽과 서북쪽으로는 홍콩의 상징목(象徵木)인 보히니어를 비롯해 금련교(金連翹-Duranta iorentzii) 등 아열대의 교목들과 그보다 키가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고 빽빽한 대숲과 해동화(海桐花-Pittosporum tobria), 철쭉과의 영산홍 등이 어우러져 제법 숲속의 깊숙한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거기에 예외 없이 내가 사랑하는 그가 금련교 안쪽 가지의 나뭇잎 사이에 작은 몸을 숨긴 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기, 저 나무. 오른쪽 윗가지 사이...”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허리를 약간 굽힌 채 아내에게 그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

순간! 목에 하얀 반점이 있고 까만 얼굴에 고깔모자를 쓴 듯 머리 위의 깃털이 뾰족하게 원추형으로 되어있으며 홍갈색의 앞가슴을 제외한 몸 전체가 갈회색으로 된, 긴 꼬리의 예쁜 새 한 마리가 푸르르 날아올랐고 미처 내가 피할 사이도 없이 아내의 작은 두 주먹이 새가 나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황홀한 표정으로 그 새를 바라보고 있는 내 등 뒤로 연거푸 날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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