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작가의 말>
쓰게 된 동기
집 가까이에 있는 문학산 둘레길을 걸으며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해 보곤 했다. 개항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나 물밀듯이 밀려오는 새로운 문명과 문화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고 복잡한 국제관계와 맞물려 외세의 격랑에 침몰하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도 민족혼을 일깨우는 지성의 목소리는 살아있었고 이러한 목소리가 문학의 꽃으로 피어나면서 국민을 계도하기도 했다. 그 현장이 바로 인천이었다. 어느 날 인천의 옛 이름인 미추홀을 떠올리며 처음 보는 오솔길을 따라 문학산 둘레길을 오르다가 문득 누군가 이 길을 처음 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처음 걷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눈에 들어오는 송도신도시와 인천대교로 이어지는 영종도 국제공항이 바다에 대한 꿈을 지녔던 비류 왕자와 맞물리며 크게 오버랩(overlap) 되었다. ‘비류 왕자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내려온 뒤에 이 이야기를 어느 여성 문인에게 하자 크게 반기면서 강화도에 별장처럼 사용하는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집필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소설 <미추홀>은 후에 연의재(娟義齋)로 명명된 그곳에서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제1의 조선 기술과 반도체 생산량 세계 2위, 자동차와 철강생산량 세계 5위, 정유 생산량과 수출 규모와 군사력이 세계 6위에, 10대 경제 대국이며 같은 순위의 해양 강국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오늘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배경에 인천의 지대한 역할이 있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인천은 1,066.47 평방킬로미터의 넓이에 168개의 섬을 거느리고 129만여 세대, 6만 7천여(법무부 통계) 외국인을 포함해 300만 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이다. 인구로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넓이로는 서울, 부산을 제치고 가장 크다. 여기에 더해 750만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동포)를 위한 재외동포청이 소재해 있어 세계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세계 제6위의 영종도 국제공항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의 관문으로서 한국의 내일을 여는 희망이며 국가의 자존과 긍지를 지닌 도시이다.
이런 인천이라는 도시가 우리나라 상고사에서 삼국시대를 연 중심도시 가운데 하나로 비류 왕자가 세운 나라의 왕도였다는 사실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떤 이유로 이 도시를 세운 비류 왕자의 세력이 온조가 세운 십제(什濟)에 흡수되면서 백제의 시조 온조의 기록만 역사에 남게 되고 비류의 기록은 사라지고 말았을까? 이 의문을 풀어보면서 동양사 최초로 바다의 왕국을 꿈꾸던 비류 왕자의 흔적을 더듬어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후세에 정확하게 알려야겠다는 강한 의욕이 미추홀의 집필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됐다.
시대적 배경
지금으로부터 2040여 년 전, 유리왕 세력의 위협을 피해 남하한 소서노와 비류, 온조 두 왕자의 건국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대륙의 세력 판도의 변화와 철기 문명의 확산에 의한 인구이동이 활발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던 시기에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도 제 부족을 통합하면서 큰 세력으로 성장하자 남쪽의 진(秦)과 충돌이 잦아졌고 이에 위협을 느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세상은 두 강대국과 동쪽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세 조각이 나게 되었다. 만리장성은 평화를 보장하는 장벽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이 아닌 불통과 대립을 상징하는 장벽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난을 피해 고향을 등지는 유이민이 늘어나면서 농경사회인 진이나 유목사회인 흉노와는 달리 수렵과 농경을 병행하고 있던 동쪽의 조선(고조선)에도 불똥이 튀어 대략 BC250년 전후로 조선은 요서와 요하 동편의 요동 일부를 내어주고 한반도로 물러나 왕검성(평양)을 수도로 삼았다.
대륙의 강자인 진과 흉노의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진이 망하고 진의 뒤를 이은 한(漢)의 내정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때 연나라의 장수로 있던 위만(衛滿)이 조선에 귀의해 정권을 탈취하고 왕위에 올랐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 대에 이르러 한에서는 무제(武帝)가 제위에 올랐다. 한무제가 흉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보내 동맹관계를 시도하면서 서역의 정치 세력들이 상업적 이익이 훨씬 유리했던 한과의 관계를 더 중시해 흉노의 세력이 약해졌고 한은 상당한 부의 축적과 함께 국력이 강성해지고 백성들은 더 넓은 세상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질이 다양하게 향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노와 대립하고 있던 한무제의 회유를 우거왕이 거절하자 한의 공격으로 마침내 조선이 멸망하고 임진강과 한탄강 이북의 땅은 한이 설치한 낙랑군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깨어난 백성들이 민족운동을 일으키면서 부여(夫餘), 옥저(沃沮), 동예(東濊) 등이 먼저 일어났고 고구려도 현도군(玄菟郡)의 세력을 밀어내고 건국되었다. 그리고 한의 세력권 밖에 있던 삼한의 진한(辰韓)에서 신라(新羅), 마한(馬韓)에서 목지국(目支國), 변한(弁韓)에서 구야국(狗倻國)을 포함한 가야국(伽倻國)이 일어섰다. 일본도 규슈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진, 한의 통일 과정과 조선의 정치적 변동으로 난을 피한 유이민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농경과 철기 문명의 전수로 조몬(繩文)시대를 마감하고 야요이(彌生)시대를 열면서 구니(國)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소설 미추홀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서역으로 통하는 육로(실크로드)만이 아니라 바다로도 더 넓은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꿈을 지녔던 비류 왕자의 이야기를 오늘날 세계 제일의 조선강국(造船强國)이 된 대한민국의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담아내려 했다.
작품의 의의와 특징
미추홀을 쓰면서 당시의 역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몇 가지 풀어내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부터 기자조선에 대한 해석, 위만의 인물론, 한의 지배권에 들게 된 조선의 후예들이 한에 강력하게 저항한 흔적이 곳곳에 있음에도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 비류 왕자 일행이 남하하게 된 배경(주몽의 죽음과 왕위가 유리 왕자에게 돌아간 사연), 삼한의 기원에 대한 해석, 비류와 온조의 혈통에 관한 논란과 형제간 미묘한 관계 등 어느 것 하나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순히 인천의 역사를 더듬는 게 아니라 한국 상고사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않고서는 비류의 행적에 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한국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도 살피면서 그 시대 해안선이나 산천의 지형, 주거 형태, 식생활을 비롯한 풍속과 정치구조, 사회현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비류 왕자를 중심으로 한 소설 <미추홀>이 비록 허구(fiction)이기는 하나 여기서 언급한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이야기가 추후 한국사를 전공하는 후학들에 의해 명쾌한 논문으로 한국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항구도시인 인천이라는 지역사회가 한국사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근대화 과정에서 현대에 이르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상고사에서 삼국시대로 가는 길목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양사는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유목민족, 그리고 동쪽의 동이족(조선)이 대륙을 삼분한 가운데 바다 건너 일본까지 포함한 역사이다. 필자는 이러한 입장에서 몇 가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 사안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작품에 반영했다. 주로 하권에서 다룰 내용이지만 먼저 우리 민족이 최초로 외세의 지배권에 들게 되었을 때 낙랑군을 비롯해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등 곳곳에서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 사실이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했고 이러한 저항 세력의 이합집산이 삼국시대의 출현으로 이어진 배경으로 보았다. 비류의 세력이 남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인 주몽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전에 이미 실권한 상태였거나 모종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한의 출현에 대해서도 위만에게 쫓긴 준왕(准王)이 남하해 진국(辰國)을 세운 뒤 우거왕이 한무제의 침공에 패해 망하고 유민들이 진국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세력이 나뉜 것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더 깊이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류와 온조의 부계 혈통에 대해서도 비류는 우태(優台)의 아들, 온조는 주몽의 아들로 보고 싶으나 논리적인 추론이나 정서(情緖)상으로는 둘 다 주몽의 아들로 보는 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무리가 없다고 보아 후자를 선택했다.
대략 13년 동안 존립했던 비류의 시대. 비유하자면 대한제국의 존립기간 13년의 상황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낙랑과 마한의 틈새에서 가장 크게 보아 북으로 임진강과 한탄강까지, 남으로 안성천 일대에 이르는 3~4만 호의 15~20만 인구를 거느린 작은 나라로 장건의 실크로드 못지않게 바다로 통하는 더 넓고 큰 세상을 꿈꾸던 비류의 흔적이 온조의 백제 건국으로 이어진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인천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되새기며 이제는 땅과 바다만이 아닌 하늘(우주)까지 여는 세상에서 분단된 민족이 나아갈 길을 지혜롭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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