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맥문학> 9월호(통권 408호)에 게재
유년의 수채화
1. 하굣길
나른한 한낮의 오후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재잘대며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앞서가고 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선 아이들의 이야기에 때로는 공감하며 혹은 ‘그렇지 않은데...’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아직도 학급 친구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양파'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려대곤 했다. 더러는 짓궂게 구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아마도 서울이라는 큰 도회지에서 온 피부가 희고 살결이 거칠지 않은, 종종 시골 아이들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내가 조상 때부터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그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몇몇 아이들은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고 별다른 말썽 없이 유순하게 행동하는 내 모습에 호의를 가지고 친근감을 표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눈빛은 대부분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였다.
어제만 하더라도 그랬다.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이 늘 그렇듯 시끌벅적한 가운데 반장 혜경이가 선생님이 곧 오시니까 조용히 수업 준비하고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심술궂은 몇 명이 내 주위에 모여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치근거리자
"너희들 내 말 안 듣고 계속 그 아이 귀찮게 하면 모두 이름 적어서 선생님께 보고할 거야!"
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짓궂은 아이들이 항의하면서 쉽게 물러서지를 않자, 반에서 꽤 인기 있고 영향력이 있는 은경이가 일어서서 혜경이를 거들며
"너희들 정말 말 안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하고 으름장을 놓았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가세하면서 사태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던지 그제야 모두 흩어져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알고 보면 다 같은 또래의 개구쟁이일 뿐이지 특별한 적개심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친해지겠지, 하면서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영식이나 창현이, 용남이 같은 아이들은 호위무사 못지않게 나에게 신경을 써주며 챙겨주는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고 당번인 우리 분단이 청소를 마친 뒤 혜경이가 선생님께 보고를 드리고 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거의 십 리나 되는 거리였는데 도중에 징검다리가 놓인 개천도 건너야 하고 조그마한 야산의 언덕배기도 두 번은 넘어야 내가 사는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대개 농촌 아이들이 그렇듯 방향이 같으면 기다렸다가 함께 모여서 등교하거나 하교하는 게 보통이었다. 혜경이네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 한복판에서 제법 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우리 집은 마을에서 다른 고장으로 이어지는 동구 밖 큰길과 야트막한 야산이 시작되는 언덕배기 사이에 있는 배나무과수원집이었다.
함께 재잘거리며 걷던 아이들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혜경이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는 향이와 나만 남게 되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혜경이가 향이를 향해
"너 빨리 집에 가야지?"
하고 먼저 가주기를 바라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는
"너 우리 집에 들어왔다 가지 않을래?"
하고 말했다. 다소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는 향이를 보내고 나서 혜경이는 다시
"우리 집에서 숙제도 하고 놀다가 가."
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혜경이는 키가 자그마하면서도 여자아이로서는 보기 드물게 야무지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총명한 아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때였음에도 입고 있는 옷도 늘 깨끗하고 화려했지만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입은 옷보다도 더 화사하고 예뻤다.
잠시 눈길을 다 낡은, 내 검정 고무신 위에 떨군 채 생각에 잠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경이네 집은 앞쪽이 가게였기에 옆으로 난 골목길에 안채로 드나드는 대문이 따로 있었다. 빠끔히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 있는 수도 펌프가 보였다. 대개의 다른 집들은 마을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양동이나 물통으로 날아다 쓰는데 이 집은 펌프를 사용하는 한 가지 만으로도 부잣집 소리를 들을 만했다.
만일 내가 혜경이의 요청대로 이 집에 들어가서 숙제도 하고 놀다 가기 위해선 먼저 저 펌프에 가서 발부터 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결하게 다듬어져 놓여있는 댓돌 위에다 다 낡은, 내 검정 고무신을 올려놔야 할 것이다. 마음과는 달리 고개를 가로젓는 습관은 이때부터 길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갈게. 잘 있어!"
아쉬운 눈길을 보내는 혜경이의 마음보다 돌아서는 내 마음이 더 크게 무너져 내림을 혜경이는 아마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2. 피란과 전학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은 2년이 넘도록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되고 있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우리는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피해 숨어 지내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뒤 제2국민병에 징집되어 국방군(국민방위군)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겼고 중공군의 침입으로 이듬해 1월 4일 서울이 재차 함락될 때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충청남도 공주까지 피란을 갔었다. 이후 4월 하순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나 전세(戰勢)가 불안정했으므로 서울 시민증이 있어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해 나는 어머니와 함께 흑석동에 머물러 지내면서 두 번째 학교의 2학년 학생이 되었다. 전쟁으로 나와 동갑인 또래들은 1학년을 겨우 2개월 남짓 다녔기에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나는 용케도 2학년에 들어가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새롭게 배우는 내용들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이내 공부 잘하는 아이들 축에 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일이 막막했기에 어머니는 나를 같은 반 종호네 집에 맡기고 아버지를 찾을 겸 돈을 벌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갔다. 이해 10월에 일제고사가 치러졌는데 이때부터 내 이름에 1등이라는 칭호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듬해 3학년이 되고 나서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어머니가 돌아와 기름진 쌀밥에 맛있는 반찬으로 내 아홉 번째 생일상을 차린 다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새아버지와 같이 살기로 했다며 새아버지가 노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미군 부대가 양주 이담면(伊淡面)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우리는 여름방학 때 그곳으로 가서 함께 살 수 있다고 했다. 서울서 살던 집은 폭격으로 무너졌고 다시 지을 돈도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는 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은 새아버지와 사는 게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울지 않았다. 피란길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을 보아왔으므로 죽음은 어느 순간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참혹했던 죽음을 목격한 건 오산을 지나 송탄 어디쯤 이를 때였다. 그날 저녁 무렵에 길가에서 밥을 해 먹고 잠시 쉬는 동안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어머니에게 말을 걸더니 날이 어두워지도록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전하자 빨리 떠나야 한다고 서두르면서 어머니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왠지 그 아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배가 아픈 듯 칭얼대며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아저씨에게 아이가 아픈 모양이니 먼저 가라고 하면서 나에게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는 잠시 쉬게 했다. 주위를 살피며 머뭇거리던 아저씨가 아쉬운 표정으로 먼저 떠나고 나서 나는 이만하면 그 아저씨가 충분히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될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서둘러 떠나고 있었기에 멀쩡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본 어머니도 부지런히 자리를 걷어 짐을 챙기고는 내 손을 잡고 남쪽으로 가는 대열에 끼어들었다.
얼마쯤 갔을까? 멀리서 포성이 들려오고 번쩍거리는 불빛이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한 마장쯤 되는 앞쪽에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불기둥 같은 것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으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빨리 가지 않으면 중공군이 밀려와 우리 모두 죽게 된다고 해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캄캄한 길을 기를 쓰고 가는데 얼마쯤 가다가 나는 발끝에 무언가 걸리면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손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끝에 뭉클한 느낌이 드는 물체가 있어 자세히 보니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서가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술렁대더니 누군가 횃불을 가져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횃불이 하나둘 밝혀지자 여기저기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넘어질 때 내 손에 끈적한 느낌이 들었던 게 죽은 사람의 피라는 걸 알았다. 질겁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어머니가 급한 대로 헝겊 조각으로 닦아주고는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채 아직도 연기가 나는 집으로 가서 우물물을 길어 내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죽거나 다친 게 사람만이 아니라 개도 있었고 다른 가축도 있었다. 이곳 마을 사람인지 엉덩이 살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소를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아까 앞쪽에서 난 폭탄 터지는 소리와 불꽃이 일던 자리가 여기였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중공군이 피난민에 섞여 내려온다는 정보로 미군이 한밤중에 내려오는 피난민을 중공군으로 잘못 알고 폭격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우리보다 앞서 떠났던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도 그 생각이 났는지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여기서 이 사람들처럼 죽었을 게다.”
하면서 천만다행이라는 듯 나를 꼭 껴안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스쳐 간 건 그때만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던 때 연희동을 지나 서울로 들어오던 미군과 인민군이 아현동에서 총격전을 벌일 때 미군이 쏘는 카빈이나 M1 소총은 ‘피웅, 피웅’ ‘탕, 탕’하는 소리가 났고 인민군이 쏘는 총소리는 ‘딱쿵, 딱쿵’ 하는 소리가 났는데 아들을 찾으러 나선 이웃집 아주머니가 길을 가다가 어느 편에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총알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지던 모습, 폭탄이 터지면 방공호 안에까지 파편이 날아들기도 했는데 겁에 질린 이웃집 영감님이 만류하던 사람들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역시 총에 맞아 죽던 모습, 집에 다녀오기 위해 잠시 방공호를 나올 때 귓가에 ‘부웅, 부웅’ 하고 마치 벌 소리처럼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나기도 했는데 나도 이 총알에 맞았으면 지금처럼 피란 행렬에는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깥방에 세 들어 살던 아저씨가 어디서 들었는지 미군이 오면 여기가 전쟁터가 되니 안전한 곳으로 가서 피해야 한다며 함께 가자는 걸 어머니가 짐을 챙겨가야 하니 먼저 가라고 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도망가던 인민군들이 그 아저씨를 따라간 동네 사람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피란 도중 냇가에서 아침 세수를 할 때 가까운 곳에 ‘슈우’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으나 용케도 불발탄으로 터지지를 않아 어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죽어 나가는 전쟁을 어른들은 왜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참 다행한 일이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허전하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결혼식도 없이 새아버지와 살림을 차리고 내가 상자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사진들을 찾아내서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그 사진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것들로 내금강과 해금강의 빼어난 경치와 아버지의 멋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어서 내가 아끼고 있던 것들이었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어머니와 나는 새아버지가 일하는 미군 부대에서 시오리 남짓 떨어진 운암마을로 이사했는데 어렵사리 셋집을 얻은 것이 마을 어귀에 있는 다소 외진 이 과수원집이었다. 과수원 주인은 다른 마을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면 와서 과수원을 돌본 후 돌아가곤 했다. 나는 2학기가 시작될 때 이 학교로 전학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입학했던 학교와 피란 후 돌아와 흑석동에서 다니던 학교에 이어 세 번째 초등학교가 되는 셈이었다. 새로 편입한 이 학교는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단층으로 된 건물 하나에 교실 6개와 교무실, 양호실에 이어 교실 두 개를 튼 강당이 있었고 뒤쪽에 우물과 사택, 그리고 허름한 칸막이로 된 변소가 전부였다. 3학년인 우리 반은 학생 수가 61명이었는데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는 3학년만 해도 일곱 개의 반이 있었고 한 반 아이들이 대체로 90명 내외로 100명이 넘는 반도 전 학년에 다섯 학급이나 있었다. 교실도 2층짜리 큰 건물 두 채에 강당과 관사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앞쪽 건물이 폭격으로 절반 가까이 무너졌고 뒤쪽 건물도 불에 타서 허물어진 곳이 있어 40개에 이르는 반 학생들이 공부할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받았는데 그래도 모자라서 교회 건물을 빌리거나 선생님을 따라 칠판(흑판)을 들고 야외에 나가서 돌멩이를 깔고 앉아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다니는 이 학교는 꽃밭과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정겨운 느낌이 들었고 운동장은 꽤 넓어 서울서 다니던 학교와 비슷했다.
3. 과수원집 아이
가을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싱그러운데 깃털 구름이나 양떼구름, 멀리 지평선 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뭉게구름이 바쁘게 움직이는 대지의 변화를 느긋하게 내려다보며 유유히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흐르고 있었다. 고추잠자리가 제법 높이 날아오르면서 저녁이 되면 앞마당의 분꽃도 색색으로 활짝 피어났다. 한낮에 그토록 극성스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신 날이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언덕배기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는 벌써 들국화의 꾸밈없는 청순한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미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 이삭이 출렁거리며 황금물결을 이루는 길 건너편 쪽의 논에서는 긴 줄에 빈 깡통을 여러 개 매달아 놓고 한쪽에서 줄을 잡아 흔들면서
"후여! 후여!"
소리치며 새들을 쫓는 소리가 정겹다. 긴 장대 끝에 줄을 매어 휘휘 휘두르다가 채찍질하듯 낚아채면 팍!, 팍! 하는 소리가 나는데 어떤 때는 제법 화약 터뜨리는 것과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물론 알곡을 까먹는 새들을 쫓기 위한 도구이다. 논 한복판에 서서 이를 지켜보는 허수아비는 양팔을 벌린 채 그저 말없이 웃고만 서 있다.
토요일 오후, 밖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나갔더니 마을에 있는 가게에 가서 몇 가지 물건을 살 것이 있다고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잠시 망설였으나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혜경이네 가게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행여나 하면서 골목길 쪽을 살펴보았더니 길가로 난 창가에서 혜경이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설레는 가슴으로 웃으며 다가가자, 대문을 열고 나오며
"지금 숙제하고 있는데 같이 할래?"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지금 아버지하고 물건 사러 왔어."
"그럼 갔다가 저녁때 올래?"
"저녁에 밥 먹고 나서 과수원 지켜야 해."
사실 과수원을 지키는 일은 가을걷이 준비를 위해 일손이 한창 바쁜 때라 과수원 주인아저씨가 특별히 부탁한 일로 낮에 학교에 다녀와서 저녁때까지 원두막에 있다가 주인아저씨댁에서 사람들이 오면 교대하는 일이었으나 간혹 어른들이 바빠서 못 오면 혼자서 호롱불을 켜고 밤늦게까지 지키기도 했다. 어떤 때는 교대를 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도 원두막에 가곤 했는데 주인아저씨나 아주머니 또는 그 댁 식구 중에서 번갈아 가며 지키면서 간혹 집에서 가져온 옥수수나 고구마, 감자 찐 것을 내놓거나 단물이 줄줄 흐르는 배를 깎아서 주기도 했다. 그 재미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쩌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날에는 부득이 자리를 피해 원두막으로 가서 호롱불 아래 숙제를 하곤 했다. 단칸방이 비좁아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도 숙제나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자리도 비좁거니와 30촉짜리 전등이 방 한가운데 달려있어 구석에서는 글씨도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원두막에 가서 공부하곤 했다. 하지만 혜경이 집에는 왠지 선뜻 들어서기가 어려웠다. 어떤 본능적인 자존심이 어린 마음에도 머리를 지배하면서 현재 유지하고 있는 괜찮은 관계를 깨뜨릴지도 모르는 무모한 접근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너희들 서로 같은 반이냐?"
혜경이의 아버지가 안채에 딸린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기 위해 들어오다가 대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빠, 얘 서울서 전학 온 그 애야."
"오, 너로구나! 그 공부 잘한다는 애가. 너 서울서도 일등 했다지? 들어와서 우리 혜경이 하고 좀 놀다 가려무나. 같이 공부도 하고."
"저, 아버지하고 같이 왔어요. 물건 사려고요."
"아, 그랬구나. 김 씨는 좋겠다. 너 같은 아들을 두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혜경이네는 아들이 없었다. 혜경이, 그리고 두 살 아래인 동생 혜림이와 딸만 둘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혜경이네와는 어른들끼리 서로 사돈 맺자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없는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어른들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을 어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서울서 온 아이라는 별칭 대신 과수원집 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과수원은 우리 가족의 소유도 아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으나 그저 과수원에 딸린 집에서 산다는 이유로 붙여진 과수원집 아이라는 별칭이 싫지는 않았다. 다른 집보다 다소 옹색하기는 했어도 과수원과 어우러진 양지바른 이 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혜경이는 여러 번 권해도 내가 선뜻 그녀의 집에 들어서기를 꺼리자 대신 내가 사는 과수원집으로 놀러 오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동생 혜림이도 같이 왔다.
혜림이는 언니하고는 성격이 달랐다. 좀 더 차분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에 어리지만 생각이 깊었다. 언니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곧잘 동생이 챙기곤 했다. 예를 들면 혜경이가 숙제할 과제물을 가지고 와선 돌아갈 때 자를 빠뜨리거나 지우개를 놓고 가는 일은 있어도 혜림이는 결코 그런 실수를 하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물건만 챙기는 게 아니라 언니가 빠뜨린 것은 없나 하고 살피면서 언니 몫까지 챙기곤 했다.
집안에 남자아이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혜림이는 처음엔 서먹서먹했으나 나중엔 오빠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나도 물론 동생이 없던 터에 친동생 대하는 마음으로 성심으로 대했다. 그렇게 해줘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귀여움을 혜림이는 그 작은 내면의 세계에 담뿍 담고 있었다.
4. 달빛 아래서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대부분 논에는 마치 바리캉으로 머리를 민 것처럼 논바닥이 허옇게 드러나 보이며 군데군데 볏단을 묶어 쌓아놓은 낟가리가 임금님 무덤만큼이나 크고 우람하게 서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식이네를 들렀다. 영식이는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고 의협심도 있는 잘생긴 아이였다. 내가 전학 온 이래 언제나 이것저것 챙겨주며 시골 생활의 재미와 요령을 깨우쳐 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집안의 농사일을 곧잘 거들곤 했다. 오늘도 누가 시키는 사람도 없건만 한쪽 타작마당에서 탈곡기를 돌리는 아버지와 형을 도와 볏단을 나르거나 어머니가 마당에 널어놓은 깻단을 도리깨로 떨어내는 일을 부지런히 거들었다. 그는 웃으면서 나에게 도리깨를 내밀며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던 것이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주는 영식이 덕에 점차 익숙해지고 재미도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려 하자 저녁을 먹고 가라고 온 식구가 권했다. 하지만 사양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는 과수원에서 배를 따기 시작하므로 포장용지로 사용하기 위한 신문지를 오려놓고 상자도 미리 정리해 두어야만 했다.
배는 벌써 사흘째 계속 따내면서 한쪽에서는 특상품(特)과 상품(上), 중품(中), 하품(下)으로 구분해 놓고 또 한쪽에서는 신문지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싸서 상자에 담았다. 다 담긴 상자는 등급을 표시한 후 아저씨들의 손으로 오늘 싣고 나갈 건 따로 한곳에 쌓아놓고 나머지는 창고에 넣었다. 과수원 일이 배를 따는 일만은 아니었다. 과수원 울타리를 따라 심었던 옥수수 대를 자르고 콩 줄기를 걷어내며 가지와 호박과 고추를 따내는 일들도 더러는 이미 끝낸 것도 있지만 아직도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가을은 바쁘고 풍성하게 사람들의 얼굴에 땀과 웃음이 배어나게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추석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혜경이 집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꽤 큼직한 직사각형 모양의 두꺼운 널판자에 아주머니들이 쪄온 밥을 쏟아놓고 남정네들은 팔뚝을 걷어 올린 채 떡메로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장단을 맞춰 내려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더 가세해 세 명이 박자에 맞춰 내려치기도 했다. 옆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큰 나무 주걱으로 밀려나는 떡밥을 틈틈이 가운데로 몰아넣고 떡메질을 계속하던 아저씨들은 떡밥이 달라붙지 않게 간간이 함지박에 담긴 물로 떡메를 씻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차진 떡밥은 종종 치켜드는 떡메에 악착같이 달라붙기도 했다.
한쪽에선 시루에 송편이 쪄지고 있었고 부엌 쪽에선 여러 가지 전과 완자를 만드는지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혜경이 아버지가 들어오더니 광에 묻어둔 독에서 뿌연 막걸리를 휘저어 한 바가지 퍼 들고나와 아저씨들에게 권하며 맛이 어떤가? 하고 묻자 모두 술이 잘 빚어진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오늘도 역시 들어가지는 않고 문 앞에서 지켜만 보다가 돌아섰다. 혜경이가 따라 나오며 내일은 같이 지내기로 약속하라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며 내일은 발을 깨끗이 씻고 신발도 잘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걷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했다.
저녁 식사 후 숙제를 거의 끝낼 때쯤 되었을 때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여니 뜻밖에도 혜경이가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와 같이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추석 쇠시라고 혜경이네가 보내는 음식이라며 머리에 이고 온 광주리를 내려놓았다. 광주리 안에는 송편과 시루떡, 인절미, 불고기와 산적, 생선전과 완자와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더덕무침 등 먹을 것들이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음식들을 덜어내고 빈 광주리에 배 몇 개를 얹어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주면서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달라는 말로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혜경이와 같이 달이 휘황하게 떠오른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달빛은 마치 금가루를 뿌려대듯 황금색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 위의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풀숲에는 찌르레기, 여치 등 풀벌레들의 합창이 한창이다. 산 아래 추수가 끝난 논밭에서 아이들이 끈이 달린 깡통에 불쏘시개를 넣고 불을 붙여 휘두르며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달빛을 타고 아련히 들려왔다. 지금도 어느 곳에선 포성이 일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만 사위에 평화가 깃든 이 시간 혜경이와 단둘이만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말없이 콩당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혜경이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달빛에 비친 혜경이의 모습은 선녀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혜경이의 입술이 열리면서
"은경이가 너 좋아한다고 하더라."
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
"너도 은경이 좋아하지?"
잠시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은경이도 좋아하나 혜경이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를 않았다.
"난, 네가 더 좋아."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지금의 이 상황에서 나쁘지는 않은 말 같았다. 그리고 은경이보다 혜경이가 더 좋다는 건 확실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이의 눈치를 살피니 달빛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혜경이의 손을 잡았다. 며칠 전 언덕배기에서 들국화 꽃잎을 만져보았을 때처럼 보드랍고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순간! 혜경이의 머리가 내 어깨 쪽으로 넘어왔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그녀의 숨결이 몇 가닥 머리카락과 함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런 모습으로 혜경이가 내 손을 잡아 가슴에 안으면서
"너 이담에 나랑 결혼할래?"
하고 물었다. 뜻밖의 말에 당황한 내가 엉겁결에
"어른들이 승낙해야지.”
하고 대답하자
"그럼, 우리 그냥 약속만 하자!"
혜경이가 몸을 바로 세우고 나를 마주 보면서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여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달님에게 맹세했다.
"우리는 이담에 결혼하기로 달님께 맹세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이 약속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어른들은 몰라도 아니 아무도 우리의 비밀을 알 수 없지만 그날 그렇게 사랑의 언약은 달빛 아래 별들과 나무와 이름 모를 꽃들, 풀벌레들이 지켜보며 축하해 주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5. 사랑과 우정 사이
“야, 너 나 좀 보자.”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대문을 열자, 지만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대문을 나서며 물었다.
“좌우지간 따라와.”
어른들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앞서가는 지만이를 따라 뒷동산엘 올라가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던 지만이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너 어저께 혜경이 만났지?”
“그래, 만났는데 왜?”
“너 이담부터 혜경이 만나지 마!”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나는 심각한 얼굴로 혜경이 이야기를 꺼내는 지만이의 표정이 우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내가 만나든지 안 만나든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고 대답했다.
순간, 지만이의 얼굴이 험악해지더니 우악스럽게 내 멱살을 잡고
“혜경인 내가 좋아하니까 만나지 말란 말이야.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아들었어?”
하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지만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로 덩치는 중학생 못지않고 힘도 세서 어른들이 지는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돕기도 하는 선머슴 같은 친구였다. 비록 전란 중에 제대로 배울 기회를 잃고 뒤늦게 다시 편입했으나 공부엔 소질이 없었던지 두 해나 낙제를 거듭해 아직도 3학년인데 올해도 낙제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이 바닥을 맴돌고 있었다. 이런 지만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나를 짝으로 앉혀 지만이의 공부를 돕게 했는데 간혹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집으로 찾아와 숙제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지만이는 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내 편을 들었다. 한번은 이웃 마을 아이들과 제기차기 시합을 했는데 시비가 붙어 4학년 형이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지만이가 잽싸게 나서서 보기 좋게 그 형을 때려눕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지만이가 이처럼 심각하게 나오는 걸 보면 공부하는 일이나 나에 대한 우정보다 혜경이를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금방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는 이웃 마을 4학년 형처럼 저 쇠뭉치 같은 주먹에 나가떨어지든지 아니면 혜경이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를 어쩌나?’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지만이가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달래듯이 말했다.
“사내로서 약속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지만이에게 해경이가 소중하듯이 나도 지만이 못지않게, 아니 지만이보다도 훨씬 더 혜경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순간,
“이 자식이.”
하는 소리와 함께 지만이의 손에 잡힌 내 몸이 그의 어깨에 걸치는 듯하더니 어느새 하늘에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서너 발작 아래 비탈길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하늘이 빙빙 돌고 땅도 기우뚱거리는데 지만이가 다가오더니
“너 혜경이 만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하고 위협적으로 엄포를 놓았다. 어디 아픈 데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으나 몸을 움직이려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없어지고 오기가 생기면서 지만이의 엄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만나지 않으려 해도 같은 반인데 어떻게 안 만나? 그리고 헤경이가 반장인데 부르면 만나야지. 네가 만나지 말라고 해서 못 만나겠다고 말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숨을 몰아쉬면서도 또박또박 대꾸하자 내 반응이 뜻밖이어서인지 자신이 못 만나게 한 사실을 혜경이에게 들키는 게 창피해서인지 아니면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지만이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암튼 네가 먼저 만나자고 하지 마. 알았어?”
하고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혜경이를 만나는 일이 망설여졌다. 하늘에 붕 떴다가 나가떨어지는 일을 다시 당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만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선생님이 지만이를 짝으로 정해주기 전에는 지만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힘도 세고 나이도 많아 어른스러운 지만이가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줄 때 군소리 하나 없이 열심히 듣고 따라 하면서 틀리거나 잘 풀어내지 못하면 쑥스러운 표정으로 미안해하기도 해 나도 더 정성스럽게 지만이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친구이면서도 형처럼 생각하곤 했었다. 사실 지만이는 공부하는 문제만 빼놓고 보면 과묵하면서도 의협심도 있고 정이 많은 좋은 친구였다. 한번은 지만이가 피사리하다가 새참을 들 때 어쩌다 개구리 한 마리가 새참이 든 광주리에 뛰어들었는데 개구리를 잡아 다시 논에다 놓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심성이 참 고운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더 정답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지만이가 왜 하필 혜경이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지만이 집에서 신작로 건너편 쪽에 사는 송이가 은근히 지만이를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지만이도 송이를 좋아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들 말씀에 인생은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아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거라고 했는데 지금 혜경이와 나 사이에 지만이가 끼어드는 것을 어떻게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이건 정말 까다로운 숙제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로 아무리 해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만이 눈을 피해서 몰래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지만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에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러니 어쩌다가 혜경이와 마주쳐도 예전 같지 않게 서먹한 기분이 들면서 말수도 적어지게 되었는데 내막을 모르는 혜경이가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을 땐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밥맛도 없어지고 재미있는 놀이나, 심지어 공부하는 일도 흥미가 떨어졌다. 만사가 다 귀찮고 짜증이 나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혼자 뒷동산에 올라가 어른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웅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6. 학예회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하느님이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인지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아주 깨끗하게 해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혜경이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물론 지만이는 여전히 혜경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나 지만이의 뜻과는 상관없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무런 제약 없이 혜경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글날이 지난 며칠 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12월 초에 학예회가 열리는데 우리 반에서는 무용과 바이올린 연주, 연극을 발표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몇몇 아이들을 호명해 내일부터 방과 후에 무용과 바이올린, 연극을 연습하게 했는데 나는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무꾼 역을 맡았고 혜경이는 무용수로, 그리고 은경이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연주자로 뽑혔고 키가 제법 큰 창현이와 영식이는 풍물놀이 패거리로 뽑혀 5학년 형들과 함께 연습하게 되었다.
시골 학교라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연극이나 풍물놀이 등은 그 역할을 맡은 반과 운동장에서 연습하고 노래와 무용,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은 강당처럼 사용하는 큰 교실 한쪽에 천으로 칸막이를 쳐놓고 따로 나누어서 연습했다. 나는 나무꾼 역을 맡은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어른스러운 억양으로 대사를 외우고 걸음걸이와 표정도 시골 영감의 흉내를 내곤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곧바로 무용 연습을 하는 곳으로 가서 혜경이의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어쩌다가 연극 연습이 길어지면 먼저 연습을 끝낸 혜경이가 돌아와 내가 하는 연극을 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연습이 끝나는 대로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때로는 연습 외에도 의상이나 소품을 정리하느라 날이 어두워서야 돌아오는 날도 있었는데 야산 언덕배기 으슥한 곳을 지나 올 땐 혜경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팔짱을 꼭 끼기도 했다.
이처럼 행복한 가운데 진행되던 연습이었지만 행복을 시샘하는 불행은 언제나 그 행복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기도 했다. 유엔의 날(10월 24일)이 지나고 10월 마지막 주가 시작되던 날, 여느 때처럼 내 역할을 끝내고 혜경이의 무용 연습을 지켜보려고 강당으로 가는데 마침 제일 앞쪽 칸막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은경이와 눈이 마주쳤다. 뜻밖이라는 듯 환한 미소를 보내는 은경이의 눈빛을 보며 나는 은경이가 자기가 연습하는 것을 보러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은경이는 연습하던 것을 중지하고 바이올린을 든 채 활을 잡은 손과 머리로 자기가 있는 쪽으로 오라는 몸짓을 했다.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막 은경이가 있는 칸막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뒤에서 혜경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혜경이가 내가 왜 그리로 가는가?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은경이를 발견하고는 두말없이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으로 난처한 순간이었으나 은경이에게 짤막한 말이라도 나누고 오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악기연습실로 가자, 은경이가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더니 내 팔을 잡고 피아노를 치고 있던 6학년 누나에게 우리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아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경희 누나는 교장 선생님 딸로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해 전교에서 모르는 아이가 없었는데 피아노까지 잘 치는지는 나도 처음 알았다. 은경이가 나를 소개하자 경희 누나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너 서울에서 온 그 아이로구나?”
하면서 은경이 하고 친하게 잘 지내라고 했다. 은경이는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라 집안끼리 자주 왕래하면서 경희 언니와는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희 누나가 피아노 연주로 상도 많이 받았는데 서울까지 가서 받은 상도 있다고 알려줬다.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경희 누나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자, 누나는 내가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피아노 소리 듣고 싶으면 학예회가 끝난 뒤에 언제든지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원래 학교에는 풍금(오르간)만 있고 피아노가 없었는데 교장 선생님 댁에 있던 피아노를 학예회 때 사용하기 위해 미리 강당에 옮겨 놓고 연습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풍금이 아닌 피아노를 처음 본 건 서울에서 지내던 지난 1학기에 같은 반 반장이던 영길이의 생일 초대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영길이 아버지가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전쟁 중이었음에도 늘 양복 차림에 검은색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집에는 가정교사와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마도 영길이가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어서 영길이 어머니를 비롯해 온 식구가 모두 영길이를 끔찍이 위하는 것 같았다. 내가 놀랐던 건 영길이의 방에 침대와 피아노도 있었으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전과지도서’와 ‘수련장’이란 책 때문이었다. 호기심에 그 책을 펼친 순간 ‘세상에!’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전과지도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자세히 풀어 설명한 책이고 수련장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문제들까지 풀어볼 수 있도록 시험지처럼 만든 책으로 이런 책들이 있다면 선생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혼자서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영길이가 공부를 잘하는 비밀을 알게 됐지만 이런 걸 어디서 구하나 궁금해졌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전과지도서 책과 함께 건반을 누를 때 울리던 피아노 소리였다.
혜경이의 무용 연습이 끝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혜경이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혜경이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참으로 어색하고 서먹한 표정으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면서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날처럼 하굣길이 멀고 지루하게 느껴진 날은 없을 것이다. 마을에 거의 다 이르러 마지막 고개를 넘을 때 혜경이가 입을 열었다.
“은경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은경이 하고는 별말 없었어.”
실제로 무슨 특별한 말을 했던 것도 아니고 자칫 혜경이의 심기를 건드리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짧게 대답하자
“근데 왜 그렇게 오래 있었어?”
하고 퉁명스럽게 다시 물었다.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내가 은경이를 만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던 게 분명했다.
“경희 누나랑 피아노 얘기하느라고. 경희 누나가 학예회 끝난 다음에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어.”
혜경이의 눈치를 살피니 다소 안심한 듯하면서도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겉으로는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튿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극 연습을 끝내고 무용연습실로 가니 혜경이가 보이지를 않았다. 은경이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기다렸으나 반 시간이 지나도록 혜경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다못해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서 혜경이가 오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안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맥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온통 혜경이 생각으로 뒤숭숭하기만 했다. 은경이를 만난 게 무슨 큰 죄가 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혜경이와 이처럼 서먹한 사이가 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혜경이의 마음을 풀고 다시 예전처럼 즐겁게 지낼 수가 있을까?
이튿날 혜경이는 학교에도 나오지를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수업 시간에 책을 펼쳐놓고 있어도 글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혜경이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수업이 끝났는지 영식이가 다가오며
“너도 같이 갈 거지?”
하고 물었다.
“어디 갈 건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가 묻자
“못 들었어? 혜경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잖아?”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결석한 것이로구나. 나는 마음이 한결 놓이면서도 혜경이를 아끼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얼마나 슬플까? 하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7. 꽃상여(喪輿)
늦가을의 침침한 날씨에 바람마저 썰렁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학교에 가는 대신 혜경이 할머니 장사 지내는 일을 보러 가기로 했다. 길가 전봇대 위에 까마귀가 앉아 흩날리는 낙엽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의 수를 세고 있었다. 혜경이네 가게에 도착하니 일찍 나온 사람들인지 여기서 밤샘한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대문을 드나들기도 하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이 닫힌 가게의 문짝에는 한지에 忌中(기중)이라고 붓글씨로 커다랗게 내려쓴 종이가 붙어있었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는 꽃으로 장식한 상여가 놓여있었다. 대문 옆에는 아래위로 눌렀다가 펼 수 있게 노란 종이로 커다랗게 호롱처럼 만든 통에 謹弔(근조)라고 쓴 등이 걸려 있었고 안마당에는 멍석을 깔아놓고 밤새워 먹다 남은 음식과 술상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서서 치우는 모습도 보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사이에 영식이와 창현이, 용남이가 손을 흔들면서 다가와
“언제 왔어?”
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응, 나도 방금 왔어.”
“혜경이는 만났니?”
용남이의 물음에
“아니. 어른들과 함께 있어서 만나지 않았어.”
“그럼, 우리 저쪽에 가서 있다가 상여 나갈 때 따라가자.”
영식이의 말에
“그래. 그게 좋겠다.”
하고 창현이도 찬성했다. 언제 왔는지 향이와 송이가 아래쪽 골목길 입구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마당 정리가 다 끝났는지 머리에 흰 천을 두른 상두꾼 아저씨들이 관을 운반해 상여(喪輿)에 안치하고 영여(靈輿)를 멘 사람이 앞에 서자 요령(搖鈴)을 든 선소리꾼(요령잡이) 아저씨가 상여 위에 올라섰다. 이어서 만장(挽章)을 든 사람이 상여 뒤에 서고, 상주(喪主)인 혜경이 아버지와 식구들이 모두 베옷이나 흰옷을 입고 남자들은 베 두건, 여자들은 베로 된 천이 달린 머리띠를 두른 채 서열대로 늘어서서 뒤를 따랐다.
상여 둘레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하고 민화나 그림을 붙이기도 했는데 열대여섯 명이 넘는 상두꾼 아저씨들이 상여를 둘러메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따르던 유족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행상가(行喪歌)인 상엿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어른들로부터 만가(挽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기는 했으나 처음으로 직접 보고 듣는 상엿소리는 묘하게도 슬픔이 배어있으면서도 구성지고 흥이 나는 소리였다. 선소리꾼이 먼저
“북망산천 멀다더니”
하고 앞소리를 메기면 상여를 멘 상두꾼들이
“어허리 넘차 어허야.”
로 받는 소리를 내고
“내 집 앞이 북망일세.”
하고 이어 부르면
“어허리 넘차 어허야”
로 다시 화답하는데 선소리꾼이 내는 앞소리는 청아하고 낭랑했으며 상두꾼들의 받는 소리는 장중하고도 울림이 있는 소리였다. 나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이따금 가다 서다 하거나 앞뒤 또는 좌우로 상여를 흔들기도 하면서 소리에 맞춰 걸음을 옮기는 상두꾼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며 친구들과 함께 상여를 따라갔다. 동네를 돌아 동구 밖을 나서니 선소리꾼의 목소리가 달라지면서 힘이 실리고 받는 소리도 거기에 상응하면서 상여는 어른들이 걷는 속도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상여가 장지에 이르자 소리꾼의 목소리가 느려지면서 애간장을 태우듯 이어졌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어허 어허하, 어허리 넘차 어하”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네 황천길을 누가 아나?”
“어허 어허하, 어허리 넘차 어하”
묘소에 관이 내려지자, 가족들의 통곡 소리가 한꺼번에 자지러지게 터져 나오고 혜경이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외치며 관을 잡으려는 것을 상두꾼 아저씨가 급히 말리는 모습과 그 곁에서 혜경이가 펑펑 우는 모습이 보였다. 전란 중에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으나 한 사람의 죽음이 이처럼 애절하고 경건하면서도 슬프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함께 정을 나누며 지내던 사람이 죽음을 맞아 떠나는 일이 이처럼 큰 슬픔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하고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향이와 송이도 울었고 창현이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데 영식이와 용남이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튿날 혜경이는 삼베로 만든 작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나왔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많이 울었는지 눈가에 촉촉한 느낌이 드는 그늘진 모습이 배어있었다. 간혹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땐 웃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내 미륵보살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나는 혜경이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저런 근엄한 표정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방과 후에 연극 연습을 시작했는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용연습실에 있어야 할 혜경이가 한쪽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 역할이 끝나고 나는 연극 지도 선생님께 먼저 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곧장 혜경이에게로 가서
“너 왜 연습 안 하고 왔어?”
하고 묻자, 눈길을 다른 애들이 연습하는 곳에 둔 채
“선생님이 먼저 가라고 하셨어.”
하고 대답했다. 아마도 큰일을 치른 뒤이기에 일찍 돌려보내서 쉬도록 배려하신 것 같았다.
“그럼 같이 가자. 나도 선생님 허락 받았어.”
어제와 비슷한 날씨로, 떨어져 내린 낙엽이 스산한 갈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길을 혜경이와 함께 걸으며 나는 혜경이의 마음을 풀어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 답답한 심정으로 애꿎은 낙엽만 발길로 걷어차며 걷는데 혜경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허리가 아프다고 주물러 달라고 했는데 숙제 때문에 나중에 해 드린다고 했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걸 어떻게 하겠어.”
내가 위로의 말을 하자
“그때 숙제 다 끝내고 있었단 말이야.”
하더니 그만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몸이 아프셨던 할머니를 거짓말로 핑계를 대며 도와드리지 않았던 게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하고 이제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심정을 알 만했다.
“나중에 산소에 가서 할머니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자. 여기서 이런다고 할머니가 살아나시겠어?”
나도 혜경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어른들이 하는 말투로, 위로하는 말을 하자
“그날 할머니 허리 주물러 드렸어야 했는데...”
헤경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혜경이 할머니는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혜경이를 끔찍이 아꼈다. 공부 잘한다고, 반장이라고 자랑하면서 혜경이가 응석을 부리거나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언제나 혜경이 편을 들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혜경이와 나는 길가로 물러나 앉았다.
“할머니도 혜경이 마음 다 아실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어떻게 해서든지 혜경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내가 말하자
“할머니... 내가 잘못했어... 할머니 보고 싶어!”
혜경이가 목이 메는 듯 흐느끼며 말하더니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할머니에게 미안했으면 이처럼 마음 아파할까? 나는 말없이 혜경이 어깨를 토닥거리며 달랬다. 얼마쯤 그렇게 앉았다가
“이제 일어나서 가자. 다른 애들도 곧 올 텐데.”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제야 혜경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다른 애들한테 내가 울었다고 하지 마?”
하고 이따금 딸꾹질하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며시 혜경이 손을 잡았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으나 말없이 걷는 발걸음은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월간 <한맥문학> 10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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