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와 학마을>
사랑하는 딸에게!
네가 학 삼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마음 기울여 존경과 사랑을 가슴에 담는 모습을 보면서 단순히 책이나 글을 통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와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핏줄과 관련한 친밀함으로 각별히 생각하고자 함을 잘 알고 있단다.
차제에 아빠가 학 삼촌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너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인간관계에서의 행운을 이야기한다면 아빠로서는 학 삼촌을 알게 된 것이 기연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너도 느꼈듯이 학 삼촌의 수필은 주로 관조형 글로 자연을 대하여 보고 생각하는 사실을 맑고 깨끗한 심상으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빠는 학 삼촌의 글을 대하면서 두 가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단다. 하나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작가의 목소리 즉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체득하는데서 오는 인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작가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데서 유발된 극히 개인적인 연민이었다.
아쉽게도 아빠는 수필마당을 통해 올려 진 학 삼촌의 글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참 숲에만 내리는 비>(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와 <많이 울게 하소서>의 단 두 편의 글만으로도 아빠가 학 삼촌에 대해 지녔던 두 가지 인상을 설명하는데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아빠는 학 삼촌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의 모티브를 헨리 소로우와 젊은 시절의 절친했던 한 친구로 자연스럽게 압축하게 된 것이란다.
너에게 소로우를 이야기하기 위해 어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 1817~1862)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가 <원칙 없는 인생>이란 그의 글을 읽었다. 그가 월든 호숫가를 찾아 2년 2개월 2일 동안 문명과 등진 은둔생활을 하면서 <숲 속의 생활>이란 책을 썼음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엔 그렇게 각광을 받는 인물은 아니었단다. 출판물도 <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 <시민의 저항>을 한 권으로 엮은 것과 월든의 경험을 쓴 <숲 속의 생활> 단 두 권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그의 사후 44년 되는 해에 20권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고 그는 일약 미국 문단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인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 손꼽히는 사상가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특기할만한 일은 그의 비폭력사상이 간디에게 영향을 주어 20세기 위대한 성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학 삼촌의 글에서 소로우를 연상하게된 것은 사연이야 다르겠지만 문명을 등지고(학 삼촌의 경우 완전히 등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에 귀의하여 글을 쓴 행동의 결단이 같고 글에 담긴 자연에 대한 인식이 유사하며 작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긍지와 자존의식이 대단했던 점, 그리고 시대에 대한 타협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시대를 앞선 가치의식이 돋보인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읽었던 <원칙 없는 인생>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면 소로우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어떠한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요행으로 살려고 했고 요행을 통해 자신은 사회에 아무런 기여함이 없이 그들보다 덜 요행스러운 사람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을 얻으려 했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간디가 그의 자서전에서 현대사회는 일부 소수자가 대중을 착취함으로써 생활하는 것을 기계가 돕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소수자의 행위는 인도(人道)나 인간애가 아니라 탐욕과 욕망이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이것과 싸우겠다.”고 한 말과 비교해보면 생각의 깊이가 있는 지식인들의 가치관이란 이처럼 직접적인 의견교류가 없어도 그 근저에 흐르고 있는 휴머니즘의 본질이 한결같음을 넉넉히 발견할 수가 있단다.
학 삼촌의 사고형 수필인 <인간학 노트>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볼까? “일부가 선택적 구원을 받고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많은 무고한 인간들이 선악을 떠난 핍박과, 이유도 약한 죽음을 당하는 역사가 분명히 있었다.
신을 부르고 의지하기 전에 먼저 인간으로서의 '깊은 사리'에 충실해야 할 일이라 하겠다.“
물론 이 구절이 역사비판이나 휴머니즘을 설명하는 구절은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설명하는 논리 속에서 우리는 학 삼촌의 심저에 깔려있는 비판의 기준점이 휴머니즘의 가치관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유미야!
유감스럽게도 아빠로서는 아직 지식인으로서 지녀야할 자신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있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굳이 비유한다면 사물에 대한 판단이나 가치의식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빛과 어둠을 구별하여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역할을 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제 겨우 삐악거리는 병아리에 불과하니까...)
소로우의 표현방식을 빌어 말한다면 내가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찮은) 것들을 대단한 것인 양 놓지 못한 채 실제로는 거기에 묶여진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소로우는 에스키모들이 개가 끄는 썰매를 몰고 다니지만 실은 개에게 끌려 다니는 생활이라고 역설적인 표현을 했다)
바라건대 사회적 인습이나 체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몇 푼의 재물들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삶의 자유를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이르러 이제까지의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고 자신의 세계를 열어가며 제 목소리를 내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만 그러하기에 아빠가 학 삼촌에 대해 갖는 감정이 평범한 인간관계의 수준에 머물지를 못하는 것이란다. 아빠로서는 학 삼촌이 자신이 지니고 가다듬어온 천성과 덕성으로 이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머지않아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 적절한 목소리를 내는 지성의 역할을 해 주기를 몹시 열망하고 있으며 응당 그래야 된다고 믿고 있단다.
극히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학 삼촌이 간간이 아빠에게 보냈던 메일에서 무엇에 가치와 의미를 두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하는지를 넌짓 언급한 일도 있기에 아빠는 가능한 한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학 삼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뜻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성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빠의 목소리도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니? 마치 소로우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등과의 교류를 통해 콩코드그룹을 형성했던 것과 같이....
<아침의 명상> 대신에 보내는 아빠의 이 아침 편지가 학 삼촌의 인품과 존재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도 너 자신의 세계에 충실함은 물론이거니와 문학과 철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며 학 삼촌이 동양의 소로우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도록 큰 위업을 이룰 수 있기를 마음으로부터 기원하며 성원을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때로 문인들은 고독하게 개인적인 세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같은 지향점을 향해 집단적인 기류를 형성하기도 하면서 지성의 사명을 다해 시대와 사회에 영향을 주는 역사의 주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란다.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보람을 가꾸는 아름다운 날이기를 빌며 태평양의 아침바람을 맞기 위해 열어 논 창으로 한 조각 사랑의 마음을 띄워 보낸다.
21 Aug, 2003
HONG KONG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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