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산실

문학의 산실 <우수, 혹은 슬픔에 관한 소고(小考)>

필그림(pilgrim) 2007. 6. 9. 09:43
 

<우수(憂愁), 혹은 슬픔에 관한 소고(小考)>


글 / 최 은지

우수, 혹은 슬픔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직면했을 때 감정의 흐름이 가슴을 멍멍하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망연자실한 생각을 들게 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 애잔함을 느끼는 상태, 나름으로 정의해 본 우수, 혹은 슬픔이다. 이를 다시 세분한다면 우수란 애틋한 그리움을 포함하고 있으며 좀더 사색적이고, 본능에서 한 겹 걸러진 순화된 감정으로 정적인 정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은 적나라한 본능의 모습이 보여 지기도 하며, 감정이 격한 상태로 특히 동적인 정서 땅을 치고 발을 구르는 등 눈물이 수반되어 외부적으로 누구나 쉽게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을 슬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와 슬픔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비록 눈물이 수반된다 하여도 금새 기쁨으로 화 할 수 있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애잔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그러면서도 슬픔에 가까운 정서를 일러 우수라 하고 싶다.


우수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어딘지 모를 삶의 깊은 철학과 내면을 성찰하는 깊이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멋스러워 보인다. 그런 멋스러운 내 첫 번째 우수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아마도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어져도 밭에서 돌아오지 않던 가족들의 부재였다. 온 집안에 불을 밝혀 어둠을 쫓고 마당가를 서성이며 골목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반가움으로 뛰쳐나가면 "아이고 우리 막내 혼자 집 잘 보고 있었네"하는 소리와 함께 덥석 엄마 품으로 파고들던 골목길에서 우수는 곧 기쁨이 되었다. 오뉴월 해 긴 저녁무렵이면 매일같이 찾아오던 이 우수에 길들여지며 기다림 뒤의 행복과 믿음을 배우며 자랐다.

동네 골목길 친구들과 놀이에서도 우수는 있었다. 놀다보면 늘 술래가 되거나 딱지치기, 자치기, 사방치기, 줄넘기놀이, 고무줄놀이......그 어떤 놀이를 해도 억척같다거나, 꼭 이겨야 한다는 승부근성이 없는 성격 때문이었는지 일등이 못 되었다. 그런 이등만이 느끼는 우수는 놀이가 끝나고 나면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나, 술래에 대한 슬픔보다는 자신의 야무지지 못함에 대한 짙은 우수가 따라와 왔다. 그런 우수는 길지 못하여 다음날 함께 놀자 불러 주던 친구의 한 마디에 위로되던 정말 투명한 빛깔의 우수였다. 때때로 찾아오던 우수의 그림자는 명절날 얻어 입던 추석, 설빔에도 있었다. 일년에 두어 번 그나마도 얻어 입지 못하던 명절빔은 친구들의 우쭐댐 밑에 가라앉은 짙은 우수보다 차라리 슬픔으로 기억되었다. 이렇게 유년의 우수는 친구의 부름, 칭찬 한마디에 치유되었다. 그러나 우수가 자꾸만 짙어 슬픔으로 향하며 세월 따라 깊이를 더 해 갔다.


청소년기의 우수는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낡아진 책 한 권, 시(詩)한 줄에도 있었고, 친구의 말 한마디에도 있었고, 내 속내를 읽어내지 못하는 선생님에게도 있었다. 이때 우수는 청자 빛 하늘을 닮아 맑고 깊은 호수 같았으며, 깊은 사색만으로도 위로되고 친구가 보내준 예쁜 편지지속 깨알같은 글씨에도 위로되었다. 그러나 젊고 푸르던 날의 우수를 지나고 나면 현실의 벽에 닿은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에 극에 달였으며, 근원적 우수가 슬픔으로 커 가는 시절이었다. 결혼하는 친구의 화려한 혼수, 부러움에도 슬픔은 묻어났고, 나보다 그리 잘난 것 하나 없던 친구가 멋진 남자친구 앞장세워 짠~~하니 나타났을 때에도 있었고, 공부도 지지리 못하던 친구가 운 좋게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뾰족 구두 신고 화려하게 변신해서 나타났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세상에 돈과 결부 지어진 슬픔이 찾아들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한다던 남자 친구와 결별을 선언했다고 엉엉 울던 친구의 눈물을 보며 내 무딘 언어로 마음의 위로를 주지 못한 슬픔도 있었다. 우수와 슬픔이 혼재되어 세월 따라 두터워 지며, 위로 받기 어렵고 치유되기 어려워 작은 가슴속에 한케, 한케 쌓여 가는 슬픔으로 자랐다.


결혼과 동시에 찾아온 우수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친구의 입택 잔치에서, 아들 낳았다고 상다리 휘어지게 하는 백일잔치에서, 내 것 보다 좋아 보이던 새로 산 가구에서도 우수는 있었다. 남편의 보너스 봉투가 얇다고 투정을 하는 친구의 얄미운 입술에도 있었고, 손 끝 여문 솜씨에도 있었으며, 친구의 손에 들린 운전 면허증 빛나던 광채에도 우수는 여물어 갔다. 그렇게 일기장 속에서 여물어 가던 우수가 내 안에 벽을 허물고 저벅저벅 걸어 나와 인터넷 바다에 닻을 올렸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하얀 포말이 일 듯 밀려왔다 밀려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우수를 삭혀 글로 토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도 우수는 자랐다.

함께 글 나누던 친구의 단절이 그랬고, 달콤한 언어로 내 오감을 자극하며 유혹하던 번지르르한 말과 가면을 쓰고 가시도친 언어로 폐부 깊숙이 찔러대며 난도 질 하는 익명의 누군가와, 상술이 녹아든 문학이 그렇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인식이 그렇고, 매일이다 시피 떠도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자살이 우수와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우수도 나이를 먹는다.

불혹을 넘은 내 우수는 TV 화면 애잔한 사모곡에도 있고, 무심결에 들려오는 대중가요 한 토막에도 있고, 벼락부자 된 어느 평범한 사람에게 있고, 몰락해 버린 백만장자의 비운에도 있고, 쓰다만 소녀시절 일기장에도 있다. 우수는 굴러가며 눈덩이처럼 살을 붙여간다. 나이를 먹은 우수는 보는 곳, 느끼는 것마다 가슴을 에게 한다.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도 있고, 잘못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도 있고, 외롭게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에도 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수가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 자체에도 우수는 깃 든다. 아마 쉰 살, 예순 살을 지난 우수는 아이들이 대학 합격통지서, 취업통지서, 군대 입영 영장 통지서, 각종 통지서 속에 있을 것이다. 통지서 속에 자라던 우수는 아이들이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려가고 자잘한 일상을 살아갈 때쯤 되면 초연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문득 어느 친구의 부고 장을 받아 들고 슬픔에 겨워 꺼이꺼이 울다가도 이내 잊혀지고 또 세월을 가르며 나이를 먹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일흔 지난 어느 날, 석양 노을이 붉게 물드는 바닷가 벼랑 위에 한 그루 늙은 소나무처럼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우수의 이력서를 살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우수마저 그리워 눈물 짖게 되는 것은 아닐까?......잘 가꾸어진 난(蘭) 화분을 보며, 아니 손자의 손을 잡고서.....먼 곳으로 시선을 응시한 채.


* 오늘 立秋를 지나는 햇살은 가을을 닮았나 봅니다.

이른 새벽 선 듯 불어오는 바람에 열어놓은 유리창 닫고, 발 밑으로 밀어 놓았던 이불 한 자락 끌어와 덮고서야 재차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음을 보면, 계절의 변화는 속일 수 없는가 봅니다.

혹 태풍의 영향 때문일지라도 바람 끝이 시원한 하루 시작, 그러나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 속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제우스 선생님, 학마을 선생님 두 분을 비롯하여 문학산장을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의 평안을 빌면서 글 한편 평 바라기에 올려놓습니다.  아낌없는 고견 부탁드립니다.

* 최 은지 작가의 이 글은 이미 출판된 '내 마음의 보석'에 실려 있음.
  서재 : chamsol163.kll.co.kr
  블로그 : blog.daum.net/chamsol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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