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글>
글 / 김 의중
얼마 전에 ‘손으로 쓴 글, 가슴으로 쓴 글, 머리로 쓴 글’이란 제목의 글을 올린 일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글 제목과는 달리 어느 님에게 가해진 글로 인한 상처를 위로하는 뜻에서 쓴 편지글이었습니다.
다만 그 편지글의 내용에서 글 제목으로 사용한 ‘손으로 쓴 글, 가슴으로 쓴 글, 머리로 쓴 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므로 나중에 이와 관련한 제대로 된 글을 올리리라 생각했었는데 이것도 일종의 글 빚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늘 무게를 느끼게 하더군요.
그 글의 제목대로 제대로 된 글을 쓰자면 꽤 적지 않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할 것 같아 오늘은 그것을 나누어 ‘손으로 쓴 글’이라는 제목으로만 써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글 빚을 완전히 갚지는 못했지만 일부라도 상환한 셈이니 나머지는 다음을 기약하며 한숨 돌릴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처음 올렸던 글에서 이야기한 ‘손으로 쓴 글, 가슴으로 쓴 글, 머리로 쓴 글’의 의미가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들의 지식이나 문장능력의 정도를 등급을 나누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글이란 어떤 글이든지 쓰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담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등급으로 매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어떤 분이 올린 글이 특정인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글이라면 가슴에 따뜻함과 감동을 전해주는 글도 아니요 무언가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거나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글도 아니므로 손으로 쓴 글로 생각하라고 의미의 비중을 낮추어 말한 것뿐입니다.(그 글을 올리셨던 분이 이미 그 글을 삭제했을 뿐만 아니라 사과의 글까지 올리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신 점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굳이 손으로 쓴 글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글이 수필마당의 본래의 취지인 문학성에 바탕을 둔 글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선 어떤 흉기를 택하든지 손을 사용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글이라면 이는 분명 글을 흉기로 사용한 것이므로 손으로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그 크기에 비해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체적으로 상대를 공격해 일격에 무너뜨릴 만한 육중한 뿔이나 날카로운 손톱, 한번 물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독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공격은커녕 자신을 방어할 변변한 호신기능조차 없습니다.
그럼에도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무기나 호신장구보다도 훨씬 더 유용하고 유리한 게 사실입니다. 근거리만이 아니라 먼 거리까지 공격이 가능하고 어떤 종류의 위험도 손을 먼저 사용함으로 사전에 그 위험을 방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공격이나 방어의 수단만이 아니라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존의 수단으로서도 손의 활용은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먹이를 취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연약한 피부를 외기(外氣)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옷을 만들어 걸치면서 점점 더 유용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할수록 손의 사용법은 더 광범위해지고 정교해졌습니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기호나 그림을 사용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잘 알려진 스페인에 있는 알타미라동굴벽화나 연초에 공개된 이보다 훨씬 오래 전(약 7만 년 전)에 그려진 추상화로 추정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룸보스동굴벽화 등이 좋은 예가 되겠지요.
자고로 인간이 생존을 위해 손에 지녔던 도구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어 온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구조도 점차 조직화되고 경제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면서 이제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렵의 도구가 아닌 이재(理財)의 수단으로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이 확보한 재화에 대해 이를 지키거나 남의 것을 탈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기를 손에 들게 됩니다.
이 시대의 여인들의 경우에는 가족들을 위해 가사에 도움이 되는 길쌈이나 재물을 관리하기 위한 패물을 즐겨 손에 쥐게 되는데 점차 패물의 의미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독특한 노리개 문화로 이어집니다. 그 손끝에 때로는 은장도를 쥐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만 정절을 지키거나 남성들의 거친 손길을 물리칠 수 있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지닌 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인간의 손이 더 이상 생존이나 전쟁, 또는 경제적 가치에 국한해서 그 효용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손이 이룩한 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관과 예술과 과학의 위대한 진보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씌어 진 철학과 문학, 불멸의 미술과 음악작품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탄탄한 기틀은 바로 오늘의 현대문명을 가능하게 한 길 안내자였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볼테르가 쓴 ‘깡띠드’라는 책을 읽으면 르네상스 혁명이전의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허무하도록 단조롭고 비참했던 삶의 내용과 르네상스 시대를 통한 인간의 희망과 의지를 작가의 손끝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손의 역할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보다 폭넓은 추상적 개념을 지니면서 다변화와 다양성, 다목적성을 지니는 쪽으로 발전해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면서요.
손으로 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지시하기도 하며, 언어를 대신하는 수화의 기능이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조각과 공예를 다듬으며 춤이나 예술적인 몸짓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는 일에 있어서조차 손의 기능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사이버세계를 통해서 한없이 뻗어나가는 인간의 손길을 끝도 없이 바라보게 됩니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폭력과 부정(不貞)을 뜻하는 ‘검은 손’의 기능이겠지요. 한 가지 아이러니는 부정과 비리를 일삼는 검은 손의 기능은 한결같이 최고학부를 나오고 충분한 능력을 검증 받은 일부 지도계층에 있는 똑똑하고 존경할만한 분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폭력배나 소매치기정도의 범죄는 그 피해가 한 두 사람에 그치는 사소한 것이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말이 무궁무진하겠으나 마음마저 탁하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 꼭 필요한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생각을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의 의미는 그 기능 면에서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두 손을 다 들면 항복의 표시로, 손을 털다라는 말은 관계를 청산한다는 뜻으로, 그리고 서로 손을 잡는다는 말은 화해와 협력을 나타내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는 것 등입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손의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건을 잘 만들거나 다루는 일을 솜씨가 좋다고 하며 손과 관계없는 부분도 솜씨로 표현하는 예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말을 잘하면 말솜씨가 좋다고 하고 온 몸을 사용하는 춤도 춤 솜씨로, 그리고 노래를 잘하는 것도 노래솜씨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글을 쓰는 이야기로 돌아와서 손으로 쓰는 글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들어왔던 이야기지만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이 의미는 글로써 사람을 해치는 기능이 군대에서 사용하는 병기의 위력보다 더 클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따라서 글을 흉기로 사용할 경우 개인은 물론 집단과 사회에 적지 않은 상흔을 남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는 인터넷상에 별다른 생각 없이 남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글을 올릴 경우 상대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손찌검이 될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생각 없이 손의 기능만으로 남을 해칠지도 모르는 글을 함부로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쓴 글이라고 해서 모두 폄하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편리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하듯이 손으로 쓴 글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남을 해치는 기능을 할 수도 있고 장인정신이 담긴 잘 가다듬어진 글이 될 수도 있으며 코미디 같이 재미있는 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솜씨를 발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손으로 재주껏 잘 가다듬어진 글이라면 글 솜씨가 있는 글이 되겠지요. 글 솜씨라 함은 이미 그 글을 쓰는 손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 솜씨가 좋은 글은 음식을 잘 만드는 손과 같이 읽는 사람들에게 글의 맛을 느끼게 하며 글 읽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제 수필이라는 글의 의미를 잠깐 해학적으로 생각해보면서 글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수필(隨筆)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손으로 쓴 글(手筆)이 되기도 하고 머리로 쓴 글(首筆)일 수도 있습니다. 근심어린 마음으로 쓴 내용이라면 가슴으로 쓴 수필(愁筆)이 되겠지요. 참으로 잘 쓴 글이라면 뛰어난 글(秀筆)이 되고 잘못 쓰면 짐승의 글(獸筆)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별 내용도 없이 지루하거나 너무 어려운 내용의 글은 잠이 오는 졸린 글(睡筆)일 테고 청산유수처럼 물 흐르듯 쓴 글은 수필(水筆)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수필(修筆)은 마음을 닦고 수련하는 글이며 베풀고 가르치는 글(授筆)입니다. 연륜의 무게가 담긴 글이라면 장수하는 글(壽筆)이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글이라면 가히 수필(粹筆)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칫 남에게 원수가 되는 수필(讐筆)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삭줍기 같이 적잖은 소득을 건질 수 있는 수필(穗筆)도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쓴 글은 수입을 위한 수필(收筆)이 되겠지만 양심에 부끄러운 글이면 수필(羞筆)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저것 살피며 조사하는 수필(搜筆)도 있고 올린 글에 대한 답글도 틀림없이 수필(酬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는 글을 쓰는 마음의 자세를 골수에 새기고 쓰는 수필(髓筆)이라면 손으로 쓰던 가슴으로 쓰던 머리로 쓰던 그 글은 분명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케케묵은 낡은 지식과 편협한 마음으로 쓴 녹슨 글(銹筆)이 되지 않도록 늘 새롭게 배우는 자세로 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銀芝 님이 올리신 ‘손의 미학(美學)’이란 제목의 글(No.7105)에서 투박스럽지만 자연을 가꾸어 땀 흘린 결실을 거둬들이는 성실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손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글을 쓰는 사람들의 손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아름다운 손길로 정성스럽게 자판을 토닥거리며 좋은 글을 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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