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우리가 물이 되어

필그림(pilgrim) 2008. 12. 18. 00:09

<우리가 물이 되어>


강 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한국의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층계  (0) 2009.08.12
상한 영혼을 위하여  (0) 2009.07.13
못 위의 잠  (0) 2008.12.10
접시꽃 당신  (0) 2008.12.03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0) 2008.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