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탁에 앉아서...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서인가
언제였던가 너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이 가을날을
우리들은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우는가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제였던가 한 번은
네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서인가
가을의 정취가 담긴 아침식탁에 마주앉아 커피를 타면서 아내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 시를 읽어주며 아련한 젊은 날의 첫사랑 이야기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는 연말에 친구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찾아가 크리스마스카드를 전하자 함께 근무하던 이*애라는 아가씨가 ‘저에게는 안 주시나요?’ 하고 농 반 진 반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차! 하면서 새해 연하장을 드릴 생각이었다고 궁색하게 둘러대고는 세모가 되자 미안한 마음에 일기장을 사서 속표지에 릴케의 이 시를 적은 다음 연하장과 함께 주었습니다. 뜻밖의 선물이었던지 일기장을 받아든 이 양이 ‘예쁜 선물 너무 고마워요. 일 년 동안 잘 쓴 다음 돌려드릴게요.’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 말이 가진 것이라고는 청운의 꿈밖에 없던 가난뱅이 젊은이의 가슴에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이 양은 부잣집 외동딸에 상당한 미인으로 저 같은 처지에서는 쳐다보기도 어려운 상대여서 데이트신청은 감히 꿈도 못 꾸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용기를 내어 데이트신청을 했고 이후 둘이는 3년여에 걸쳐 거의 매일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여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데 미안한 마음은 그녀의 생일에 당시 대한일보 13층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난생처음 스테이크와 코냑을 들면서 기가 죽은 제가 더 이상의 만남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식사비용을 그녀가 지불하기는 했지만 곁눈으로 영수증의 금액을 확인한 제 마음은 착잡해 졌습니다. 당시 제 월급이 2만 3천 원으로 꽤 괜찮은 편이었는데 영수증의 금액은 6천 8백 원이었으니 한 달 급여의 30%가 한 끼 식사로 날아간 셈입니다. 결혼상대로는 너무나도 부담이 되는 여성이었기에 깊이 고민하던 끝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수준으로는 이 여성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후 그녀와 만났을 때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녀의 눈망울이 지금도 마음에 걸릴 정도로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은 제 인생의 가치관의 일부를 그녀와의 데이트를 통해 정립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그녀와 함께 팔짱을 끼고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눈길을 걸으며 저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제가 바라는 이상형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인은 아니어도 건강하고 단정한 사람, 부자는 아니어도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 특별히 뛰어난 재능은 없어도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여성으로 이 때의 가치관이 이후 배우자를 선택하는 후배들에게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조언으로 제 구실을 했는데 일컬어 건강미, 교양미, 개성미의 삼미주의입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고희를 넘어서 팔순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우리는 늙더라도 서로 아끼고 존중하면서 노추하지 않게 아름답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하며 지냈습니다. 자주 그러지는 않지만 이따금 아침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내가 쓴 글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시를 읽어줄 때면 아내도 행복해 하고 저 또한 즐겁고 행복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누구나 한 때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혹여 상한 영혼이어도 한 잎 떨어져 내린 낙엽처럼 시인의 손을 잡고 어느 봄날에서인 듯 꿈에서인 듯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며 깊어가는 이 계절의 성숙함에 깊이 침잠하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