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그림(pilgrim) 2010. 4. 19. 01:11

<길>


강 희근


무덤으로부터 길이 나 있는 걸

무덤을 오르고 나서야 안다

가파른 길을 가파르다 하지 않고

하늘에 가까운 천왕봉을 어깨에 걸기를

일흔 생애

글자로 아는 일이 몸으로 걷는

길이지,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는 선생*의 짙은 눈썹이

덕천강 흐르는 물위에 떠 있다

무덤에도 바람이 불어

익어터진 솔내음 산산 흩어져 가기도 하지만

선생의 몸이 가는 길에 켜어진 등불을

등불이라 적은 신도비

쾅쾅 두드려 깨다 넘어뜨리는 눈 먼 이들이

제 머리로만 걷다가 길을 덮는 잡초 더미에

깔리어 잠들어 있는 것도 보인다

빗돌이 넘어지고 세워지고

다시 치워져 버리는 곤고한 세월에도

선생의 길은 무덤으로부터 나서 선비가

생겨나는 곳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 몸이 가다 부딪치는 자리에 부싯돌

치듯이 불똥을 켠다

볼똥이 조선을 지나고 머리 자르는

개화기를 지나고

당대를 들어와 486에도 반짝거리고

586에도 깃들다가

새 천년 기나긴 허리에도 친친이

무늬로 놓여지리라

아, 무덤으로부터 길이 나 있는 걸

무덤을 오르고 나서야 안다

선생은 길 위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으로

목청을 닦고 있는가

나 있는 길이 낙엽으로 덮이어

보이는 데까지는 낙엽이 길이 되고 있다


*조선조 실천유학의 거봉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을 말함.



이 시는 경상대 국문학교수이신 강 희근 시인님이 2003년 6월, 제 서재 <손님문학>에 남기신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