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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명시모음

필그림(pilgrim) 2007. 9. 11. 22:40

<가을의 문턱에서>


김 의중

하늘의 청명함이
깊고도 높습니다.
가는 여름이 서러워
쓰르라미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집니다.

고개 숙인 이삭들이
가고 오는 계절을 경건하게 묵상 하는데
들녘에 서 있는 허수아비는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지냈을까요.

길가의 코스모스는
고추잠자리 쳐다보며 하늘거립니다.
시간을 살피며 살랑대는 바람결에
과일은 제 맛을 내며 익어갑니다.

누군가의 땀방울이

순박한 정성으로 녹아있는 대지엔 
성숙한 영혼들이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 해로 끝나는 생(生)
한 해가 끝이 아닌 삶
엉클어진 어떠한 인연이라도
사랑의 줄만은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 기도 하소서
가을이 성큼 다가서면
애잔한 나뭇잎의 떨림조차
그대 가슴에 그리움을 부를 것입니다.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바로 이때이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초원엔 바람이 풀리게 하옵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주사

익어 가는 포도알 알알이

감미로운 향기가 스미게 하옵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외로운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입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책을 읽거나

기나긴 편지를 쓰다가

창밖 나뭇잎 흩날릴 때면

외로이 가로수 길을 서성일 것입니다.


 

<가을의 기도>


김 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시>


루벤 다리오


나의 생각이 당신 곁으로 갈 때

 향기가납니다.

당신의 시선은 너무도 달콤하게

 깊이를 더해갑니다.

당신의 벗은 발밑에는 아직도

 하얀 거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입술은

 세계의 기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사랑은

 짧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쁨과 고통에 대해

 똑같은 한계를 제공합니다.

한 시간 전에 나는 눈 위에

 그 어떤 이름을 새겼습니다.

방금 전에 나는 나의 사랑을

 모래위에 놓아두었습니다.


노란 잎들은 포플러나무 숲에

 떨어집니다.

많은 사랑의 커플들이 배회하는

 이곳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가을의 잔에는

 모호한 술이 담겨있습니다.

봄의 여신이여, 바로 그 잔속에

 당신의 장미꽃잎들이 떨어집니다.



<낙엽(落葉)>


레미 드 구르몽


시몬, 나뭇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

낙엽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애잔하다.

낙엽은 덧없이 버려져 땅위에 구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날리며 낙엽은 나직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

발로 밟히면 낙엽은 영혼의 소리로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인의 옷자락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