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ng Kong Report) 05 <비상이 걸린 도시>
<비상(非常)이 걸린 도시>
글 / 김 의중
공교롭게도 지난달 말경에 센젠(深圳)엘 다녀온 후 몸살과 감기증세가 있어 자칫 남들의 오해를 사기도 쉽고 하여 며칠동안 집에서 쉬면서 오랜만에 묵은 책들을 먼지를 떨어내며 살펴보았습니다.
아니 실제로는 내 몸 아픈 것과는 상관없이 회사도 비상사태에 대한 조치의 일환으로 며칠동안 강제휴가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출근할 수도 없는 형편이기도 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곳 사정이 자못 심각합니다. 각급 학교는 4월 6일까지 내려졌던 휴교령을 20일까지 연장했으며 교민들이 모이는 교회들조차 일요일의 대예배를 제외한 다른 예배와 집회(찬양예배, 기도회 등)를 비롯한 일체의 모임을 중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적잖은 사람들이 한국이나 일본 또는 미국, 영국, 호주 등 자녀들이 유학하고 있는 나라나 친인척이 머물고 있는 나라를 찾아 공공연하게 질병의 공포를 피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집회는 전에 비해 절반정도에 머무는 형편입니다.
오늘 토요일이기는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은 관계로 갑갑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시 회사가 있는 쿤통(觀塘) 거리를 다녀왔는데 평소에 비해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마치 연휴의 서울거리와 같이 한산하고 썰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건물들이 모두 셔터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전에 없이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반드시 출입카드를 기록하고 출입하도록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들도 단지의 주변과 건물안팎의 구석구석, 로비의 벽면과 유리를, 닦고 쓸고 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곳은 비닐로 씌워 놓고 입주민들에게는 마스크를 나누어주며 드나드는 문은 손으로 밀지 않도록 미리 열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각종 건물들의 에스컬레이터벨트 역시 경비원들이 세제와 마른 헝겊으로 닦기를 쉬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 또한 장갑을 끼거나 휴지를 사용해 엘리베이터나 현금인출기의 버튼, 출입문의 손잡이 등을 누르거나 밀고 있습니다. 해당기관에서는 상하수도 시설의 점검은 물론 행인들이 통행하는 보도블록의 틈새까지 물로 깨끗이 쓸어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텔레비전의 예방조치에 대한 안내방송 가운데엔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물건들은 가능한 한 직접 손으로 접촉하지 말 것과 심지어 사랑의 표현인 키스나 일상적인 인사인 악수도 삼가라는 살벌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가히 정부 책임자의 선언대로 도시 전체가 초비상상태요 전시체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긴 이 나라는 바람만 세게 불어도 은행 문을 닫으며 버스조차 운행을 중지하는 나라입니다. 현지 직원을 채용하는 근로조건에는 비바람의 세기에 따라 한 시간에서 세 시간까지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조퇴하도록 하는 조항이 법조문에 의거해 명시되어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은 아예 출근하지도 않습니다.
어쨌거나 지난 번 글에서 언급했던 대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나 까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당시 사회의 질병에 대한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오늘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국제도시인 이 홍콩에서 전대미문의 괴질인 ‘사스’라는 신종 질병에 의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잠시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전쟁과 질병과 기아, 그리고 천재지변의 네 가지 재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성경의 계시록(묵시록)에는 네 마리의 말(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말)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징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구태여 지구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작금의 불안한 세계정세 속에서 인류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비단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생각하는 지식인들만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Apr, 2003.
Hong Kong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