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보낸 글) 013 <학마을님께>
<학마을님께>
학마을님!
'처음 보는 남대천'을 거듭 읽었습니다. 님의 고뇌와 구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내가 기대하며 가까이하고자 했던 바램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와 경의를 다시 보내드립니다.
'아프락사스'라고 했던가요? 알에서 깨어나는 새! 때가 되면 계절의 신비로 영글던 밤송이도 스스로 껍질을 깨고 비로소 알밤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생태계에서 허물을 벗는 생명의 신비는 또 어떻습니까?
다만 인간은 관념적 의식을 벗고 새로운 인식에 눈뜰 때 이를 해탈이라 하고 거듭남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함에도 누구나 각자(覺者)의 요소를 갖고 있으되 아무나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함도 하늘의 뜻이라 하겠으니 이 아니 고뇌의 소재이며 구도자의 자세를 요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가치 있는 탄생은 아픔을 수반해서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태어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근원은 사랑이 씨앗이라는 사실 또한 경이롭습니다.
처음 보는 남대천! 님의 눈이 언제나 그렇게 새로움으로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차원의 승화이며 본원(本源)에의 다가섬이니까요.
학마을님!
님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생명은 하늘에 맡기고 살아있는 날에 님이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다가 중지한들 그것이 필연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하늘의 뜻으로 알고 순응하시어 족할 것이며 다행히 하늘이 그 일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님의 손에 의해 그것이 이루어지든지 다음세대를 통해 이루어지든지 세우신 뜻은 하늘이 길을 열어 반드시 그것을 성취하도록 할 것입니다.
(다른 많은 교향곡가운데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사랑을 받는 까닭도 곡 자체의 아름다움도 이유가 되겠으나 미완성이라는 의미가 더 애착과 매력을 끌게 하는 요소가 아닐는지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하여 우리 스스로 명을 단축하기를 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며 사리에 맞지 않고 순리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유다왕국 히스기야왕의 고사를 전해드린 나의 뜻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고통이 있을 때 이를 기억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학마을님!
개인적인 부탁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딸아이(유미)가 카페에 가입하리라고는 당일 아침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닉네임의 작명을 요구하기에 용도를 물으니 그때서야 카페에 가입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내심 반갑기도 하고 옳거니 학마을 님께 결정타가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해서, 님에게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학(crane)에 대응되는 백조(swan)를 권했습니다. 뜻밖에도 단번에 만족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더니 여러 님들이 주신 환영인사에 그만 심혼(心魂)이 다 취해버린 것 같더군요.
아비 된 입장에서 대견하기는 하나 아직 어리고 여린 탓에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회원정보 난에 25세라고 적었는데 실제로는 80년생입니다. 다만 취학이 한 해 빠르므로 79년생들과 같은 학번으로 학업을 마쳤고 일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빠를 따르던 아이입니다. 지금도 장래 하고 싶은 일을 물으면 아빠가 쓴 글을 일어로 번역해 내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시(詩)만 쓰기보다는 수필도 쓰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신경 쓰이는 독자이기도 하고요.
헌데 이 아이가 그만 학마을님에게 쏙 빠진 모양입니다. 학마을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내 쪽에 친척이 없거든요. 외가 쪽은 수두룩한데...
인생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반쯤은 딸로 생각하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 역시 님이 원하실 경우 영애에게 같은 정성으로 부끄럼 없는 마음을 쪼개어 드리면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비록 성은 달라도 이름조차 같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말씀드릴 다른 사항이지만 지금 거처하시는 곳을 경기도 어느 곳으로 옮기신다면 명실상부한 아카데미아 학마을문학산장을 개설하시기를 충심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흔해빠진 청소년 수련장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의 정기가 서린 사숙(私塾)을 마련하신다면 지금이야 도움이 될 아무 여력도 없으나 차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날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보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 내가 꿈꾸어오던 일이기도 하거니와 혼자 하기엔 벅찬 일이기에 같은 이상과 신념을 가진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오던 터였으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40년 전 그리운 친구와 나누던 꿈을 실현하는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님이 이 일을 잘 열어가기를 빕니다. 진행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또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요? 언제나 님의 심신이 강건하시고 맑고 푸르기를 기원합니다.
HONG KONG에서
제우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