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받은 글) 007 <천진함과 기적 한 가지>
학마을 인사드립니다.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두 분께서 한때나마 오롯한 분위기에 동감하셨다면 큰 다행이겠거니와, 그 또한 선배님 탓인가 합니다. 꼭꼭 감춰두고 돌려보내지 않으신 애정이 말씀입니다.
다가오는 즐거움을 일부러 거절하고 싶진 않지만 가급적 짧게 끝내고자 하는 작금의 제 심정인가 합니다. 예비 된 슬픔, 숨어있는 아픔을 생각할 때, 그때 덜 힘들기 위한 딱한 몸짓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저 담담 평온함이면 제일 좋겠으나 시절이 던져주는 대로 따를 뿐, 조막한 한 인간으로서는 감정조절이 임의롭지 못합니다.
의지적 중용은 어느 만큼 갖춰져 있지 않나 싶지만, 감정적 중용은 이토록 어림도 없음이니 이를 두고 철부지라 아니할 수 없겠지요?
제가 갈데없는 철부지란 사실을 선배님만 아실뿐 형수님께오선 부디 모르시게 하시지요, 나이 값, 꼴값 못한다는 타박은 별로 두렵지 않으나 짐짓 당겨오는 낮 붉어짐이야말로 참말로 철부지란 증거이기 때문이랍니다. (감히 토로하거니와 선배님께오서도 자질이 농후하십니다. 해서 우리끼리만 알고 웃고 넘어가자는 요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찾아오는 크낙한 기쁨이 또 하나있어 식기 전에 얼른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전해드림으로써 덜어지는 기쁨의 무게가 저를 다소 부담 없이 만들어주지 싶습니다. 어서 퍼 담아 주시지요, 저 좀 가볍게----.
<천진함과 기적 한 가지>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누옥 곁은 여느 해와 다른 희한한 풍경 하나가 생겼습니다.
꼬리가 긴 물떼새, 꼬까물떼새는 물가에 가급적 가깝게 붙어사는 물새일 뿐 분명히 산새는 아닙니다. 알도 물가 자갈밭 인적이 드문 곳에 낳아 부화번식을 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밤나무동산엔 벌써 열흘 넘어 웬 물새 한 쌍이 터잡이를 하며 아예 눌러 살고있습니다. 방안에서 창을 통해 무시로 내다봐도 한시라도 눈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높은 고음으로 '쫑쫑'거리는 울음소리도, 앉아있을 때 날씬한 두 갈래 꼬리를 아래위로 쉼 없이 깝작대는 독특한 버릇까지 갈데 없이 물가에서의 그대로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밤나무동산의 오랜 터주대감 큼직한 누룩이 뱀, 내 눈에도 충분히 익숙한 녀석을 끈질기게 뒤쫓아가며 귀찮게 구는 등 완전한 주인행세를 하고있습니다. 독이 없어 그런 진 몰라도 순둥이 누룩이 녀석은 또 물떼새가 팔랑대며 쫓는 대로 느직하게 제 마당자리를 비켜줍니다 그려----.
아무리 예전의 청량하던 물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엄연한 물새가 산새로 업을 바꾸어도 유분수이고 순서와 예절이 있어야지, 침입자인 주제에 감히 주인행세를 아무거리낌도 없이 저지르고있다는 말입니다. 굴러온 물 돌이 밖인 산 돌을 빼낸다는 이 같은 상황전개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돌연 망연해지고 맙니다.
물새야 자유로운 날개가 있으니 산새로 둔갑을 한다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으나, 산천어, 꺽지, 쉬리 등 속절없는 물고기 이웃들은 어떻게 됐을 지가 궁금합니다.
작년 막급한 수해에 뒤이어 긴 복구과정으로 말미암아 산천의 식생과 습속이 유심히 보면 많이 달라져있습니다. 야성이 원래 그런 것인 진 모르겠지만 오죽 다급했으면 물새가 산에서 먹거릴 구하면서도 산 주인에게 시비를 걸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약간의 변화가 아닐 듯합니다.
꼬까물떼새 한 쌍은 아득바득, 누룩이 한 마리는 제 갈길, 물떼새는 물새, 누룩이는 동산 지킴이, 산 마을 골짜기 세상에 그저 천진함이 있다면 이보다 더 극진할 것은 없을 겝니다.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 의외로운 시기에 찾아오는 행운은 우선 놀라움일지언정 먼저 반가움이랄 순 없습니다. 올 들어 처음 가늘게 들리기 시작한 어제 오후 한나절 매미소리와 함께 늦은 밤에 찾아온 산 마을 소식은 더욱 그랬습니다. 예정된 곱다란 기대를 완전히 놔버리고 있을 때 찾아준 반딧불이를 말함입니다. 조건이 어지간해야 기대를 걸 수 있음일 뿐, 주변의 모든 냇가가 탁류로 두텁게 덮여있는 복구공사장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눈시울이 뜨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잔잔한 감동은 약속 지킴이 이상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어느 구석 안전한 개울에서 삶을 버티다 열흘 정도가 늦었을지언정 서너 마리의 여름밤 벗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날 찾아와 주었던 것입니다. 자정 무렵 단풍나무 언저리에서 칡넝쿨 너머 다래나무 틈새까지 작년 같은 밝은 모습엔 하나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워낙 영롱한 애반딧불이의 광채였습니다.
사위를 충분히 밝힐 정도로 절반 넘어 살집이 붙은 달님의 휘황함에도 줄지도 지워지지도 않을 정도로 견실한 푸른빛의 향연을 난 기껍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디민 내 코가 기어코 납작해지도록 말입니다.
털끝하나, 광채하나 다치지 않은 채 어떻게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내게 방문의 약속을 깍듯이 지켰는지 알 재간은 없습니다. 찾아주지 않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뇌리에서 아예 지워놓고 있었던 밤 벗의 성의는 내 경솔한 판단을 마음껏 조롱하고있었습니다.
근동의 개울물은 어느 곳이라도 안전을 믿을 수가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아주 멀리서 탈피를 해 이곳까지 힘들여 날아와 주었다는 뜻, 그래서 그들의 방문이 더욱 황송하고 절절함입니다.
놀라움이 냉정함을 찾아 반가움으로 변화됨에 맞춰 난 아직 익지도 않은 산딸기 술이나마 한 컵 가득 따라들어야 했습니다.
유난히 고적하고 애절한 녀석, 이런 날 밤이면 빼지 않고 밤에만 우는 밤새도 두어 종류 울었을 겝니다. 비릿한 밤나무 꽃향기도 낮에 남은 열기를 빌려 코끝에 와 닿았을 겝니다. 어쩌면 바람도 한차례쯤 건 듯 스치고 지났을 겝니다. 하지만 난 모릅니다. 그 모두가 이승에서의 작동이라면 난 몰랐습니다.
모든 감각은 몽땅 두 눈에 하나로 몰려있으니 황금색 달빛에 둘러 쌓인 푸른 반딧불이면 내 의식은 아마 이역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을 겝니다.
속세간의 모든 인연이 말끔히 지워지는 시간, 완전의 시간, 저윽한 흐름에 걸음도 더디 지나는 시간, 그러다가 공간에 붙들린 시간이 조용히 앙탈을 부리는 시간이었을 겝니다. 이렇듯 산 마을 여름날의 하룻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난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모두가 골짜기의 기적 반딧불이 탓입니다.
여름도 벗이 찾아주는 밤 시간이 되면 아련한 천진함과 위대한 기적의 차이를 난 구별하지 못합니다. (03,06)
* 추 신 *
막상 다가온다면 슬며시 밀어낼지 모르겠으나 저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부디 행복하십시오.
고통이 증대될수록 아름다워지는 게 문장일지라도 선배님은 부디 피해 가시길 바랍니다. 너무 서글픈 팔자라 절대로 권면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제됨의 특장이고 이치에 상통하는 길일지언정 너무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제 존중함을 받으시되 팔자가 시키는 대로 전 모차르트가 될 터이니 선배님은 멘델스존이 되시지요.
다만 졸작이나마 수필마당에 띄우고픈 소망일랑 부디 접어주시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떳떳한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이 다음에 수필집으로 출판되었을 때 떳떳이 돈주고 읽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문장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방책일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장삿속은 아님일지라도 일반독자들의 심중엔 이 같이 딱한 소견이 공통적인가 합니다. 깊이 헤아려 주시옵고 용서도 해주십시오, (학마을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