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 사랑방

동인문학 사랑방 <잡석에 대한 단상>

필그림(pilgrim) 2007. 6. 10. 10:42
 

<잡석에 대한 단상>


글 / 학마을

산골짜기에 들어와 몇 년을 혼자 살다보면 만가지 것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사심도 없이 제 가치를 속속 드러내 보일 때가 있다. 비교의 필요성도 없고 눈치볼 일도 없으려니와 기존의 상식, 통념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극적인 일도 예삿일이다.
귀해서 제 가치를 더욱 드러내는 것들도 없지 않으나, 흔하고 흔한 존재들의 묻혀있던 참가치가 비로소 드러나는 경우야말로 쾌재라 아니할 수 없다. 원천의 진짜와 인공의 가짜가 확실하게 제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며칠 전 참 숲 속에 감춰두었던 산삼하나를 큰맘먹고 기어이 내 서재 책상위로 옮겨왔다. 처음 발견한때로부터 닷새 만이었다. 1년 간의 노고를 잘 끝낸 합당한 시기까지 그냥 제자리에 놔두어도 상관은 없겠으나,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할 불안함까지 억지로 참아가며 자연의 흐름에 맡겨둘 일은 없었음이다.
산골짜기에서의 걱정과 희망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니라, 주관이 자연이고 대상이 야생인 만큼 자연계의 냉정함이 먼저 좌우하기 마련이다. 쉽지 않은 심의 생체이식기술에도 스스로 자신이 있었거니와 미래를 지향한 특출한 희망전령사의 용도로서 안정감을 확실하게 확보해야할 일이 있었음이다.

이번까지 네 번째의 심 돋우기였으나 하나를 제외한 세 개의 심은 모두 생체이식을 성공적으로 행한 경험이 있었기에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그간의 지식과 요령으로 충분하리란 판단이었다. 다른 하나도 처음부터 온전치 못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생체이식을 했을 것이지만, 이미 시작부터 종말이었을 정도로 워낙 피폐한 상황이었기에 생육을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고한 산삼자신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사라질 땐 깔끔하게 사라지는 편이 나았으니까----,

숙고와 정성을 총동원한 끝에 옮겨진 약 20년 생 4구5옆 청년기의 방울형 심은 숲 속 못지 않은 건강도를 내 책상 위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발견 후 열흘이 지나 5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이즈음 일곱 개의 꽃망울 중 첫 번 째 녀석이 드디어 흰빛의 속살을 내보이며 개화를 시작한 것이다.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별꽃 모양 백색에 가까운 연녹색 꽃망울이다.

 

막상 이 장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귀한 산삼이야기가 아니다. 주방에 가지고 있던 것 중 가급적 큰 것을 골라 임시로 마련한 값싼 플라스틱 반찬그릇이 귀한 산삼을 수용하는 화분으로서의 역할을 대행하고있음도 아니다. 분재의 흙 표면에서 들러리라면 들러리일수 있는 한갓 잡석, 산 돌에 대한 생각이 있음이다.

 

산 돌은 말 그대로 잡석이다. 특별히 가공되지도 않았고 물 돌이나 차돌처럼 길게 물길에 시달린 나머지 갈고 닦여진 적절한 모양새로 다듬어져 있지도 못하다. 오다가다 발 뿌리에 채여 아프게나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존재, 귀찮으면 귀찮음일 뿐 다시 뒤돌아보지도 않을 길바닥과 산천에 내 깔린 그저 돌멩이일 뿐이다.
돈을 들여 일부러 사오는 물건이 아니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일껏 내다 버려야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로서 내 뜨락 주변은 강원도 산골답게 흙보다 돌, 잡석이 훨씬 더 많다. 밭이라도 돌밭이다.
이처럼 무가치에 가까운 잡석이 깜짝 놀랄 만큼 멋진 모습으로 변모, 의외의 제 역할을 찾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 없었던 모습이 아니라 일체의 가공도 필요가 없는 거칠게 생긴 모습 그대로를 말함이다. 이리저리 고를 필요도 없이 아무 것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주워 올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다소 여유를 부려보느라 소일 삼아 뜨락에 내 깔린 잡석을 무작위로 여 나문 개 주워와 산삼분재의 화분 표면에 세워 놓으니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이 발휘됐던 것이다. 바로 조화의 극치미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단독으론 그저 무가치한 잡석이 귀한 심과 공존함으로서 기막힌 아름다움을 창출하고있었던 것이다.

 

잡석은 있는 그대로 자빠뜨려져 있으면 10% 정도를 제외하면 제 가치가 쉽게 찾아지거나 발현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견 잡석이다. 그러나 자세를 바로 세워 일으켜보면 이번엔 아무렇게나 손에 닿는 잡석의 90% 정도가 모양을 갖춰 내면에 잠들어있던 역할을 너무도 훌륭하게 발휘해준다. 나머지 불과 10% 정도만 참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잡석, 대책 없는 돌멩이로 남을 뿐이다.
약간의 요령이 생기자 쓰임이 끝난 낡은 칫솔을 이용해 돌멩이 표면의 흙을 닦아낼 줄도 알게되었다. 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아무리 작은 돌이라도 저절로 이끼가 붙어있는 것도 짐짓 의식하게되었다. 당연히 털어냄이 아니라 분무기로 물을 뿌려 일부러 보호할 줄도 알게되었다. 여러 날 잊고 물주지 않아도 바짝 마른 채 기다리고 있다가 물만 주면 다시 녹음을 되찾는 끈질긴 생명력이 그저 고맙고 기쁠 뿐이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애먼 바위에 물 준다고 오해할 것이나 일일이 해명하고 싶지도 않다.
일개 잡석이 분재화분 위에서 이끼와 심과 함께 3박자를 이뤄 대자연의 의지를 빠뜨림 없이 표현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경험이었다. 속세간의 기준과 잣대로는 어림도 없는 아름다움이며 무공해의 순수공식이 그 속에 깃들어있었던 것이다. 늘 거기 있었던 새로운 미학이며 경악이었다.

 

모든 게 만족함도 아니었으니 이곳의 잡석에 다소 부족한 점이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바로 색상의 단순함이다. 누런 황토색으로 일률적인 돌들 사이에서 모양으로 고르는 게 아니라 색상으로 고르는 정도의 수고가 새로 생겼음이며, 얼룩이 돌도 그렇거니와, 반짝이 운모가 많은 돌도 그렇거니와, 하얀색의 석영이 띠 줄로 들어있는 돌멩이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형태미야 이미 완벽하게 갖춰져 있으니 그저 거닐다가 눈에 약간 뜨이는 색상 정도에 유념할 뿐 심혈을 기울여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그로서 한결 완벽한 재현, 실상보다 더 우월한 입체적 표현도 가능하게 되었음이다. 더구나 주워서 들고 다니다가 맘이 변해 그냥 내버려도 아까울 것 하나 없었다. 천지가 보석이니 말이다.

 

수석이라 하면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냇가의 물 돌을 이야기한다. 형태, 색상, 무늬석 등 오랜 세월 흐르는 물에 갈고 닦여져 또 다른 자연의 위력과 변혁을 드러냄이다. 잘된 수석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탄을 저절로 불러일으키며 이 경우의 수석은 한 덩어리로서 모든 표현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전혀 갈고 닦여지지 않은 흔한 산 돌인들 표정에 있어선 수석에 못하지 않다. 두 세 개만 모아 세워 놓으면 수석인 물 돌보다 작품이 될 확률은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높다. 일컬어 수석은 천 개의 물 돌 중 한 개가 나올까 말까하지만, 산 돌은 어느 것이라도 여간해서 실망을 주지 않는다.
원 없이 깎이고 갈린 하류의 물 돌과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 전혀 갈고 닦이지 않은 상류 산 돌의 표현력이 모자람 없이 일맥상통한다 함은 원천의 내재가치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 돌에도 수석처럼 한 개로서 대자연의 표정을 말해주는 것들이 드물지 않다. 널찍한 접시에 물만 담아 돌을 띄워놓기만 해도 온 지구의 풍광이 빠짐없이 수납된다. 산 돌의 결을 따라 빨려 올라가는 물기의 진한 자취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줄기의 언어가 되어진다. 입체감이 원체 명료하다보니 이리저리 돌아봐도 느낌은 하나일지언정 시야가 같은 방향은 없다.
멀리서보면 작은 동산이었다가 가까이서보면 태산의 축약판이 주먹만한 돌 그 안에 모두 들어있다. 끝도 없이 아득한 절벽의 단애가 손바닥 절반 만한 그 속에 감춰져있다. 더 자세히 보면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깊이를 알기 힘든 계곡도 있다. 돌멩이 서너 개만 세워놓으면 대자연의 축약이 너무도 쉽고 완벽하게 분재화분 위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바라볼수록 경치는 심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갈수록 잡석에서 찾아지고있었다. 먼저 눈이 가는 쪽은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심이어도 끝내 눈길이 머무는 쪽은 잡석의 울퉁불퉁한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산 돌은 산에 있어서 산 돌이 아니라 살아있어서 산 돌이 되었고 더 이상 잡석일 순 없었다. 단지 자빠져 있다가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생명이 드러난 보석도 그런 보석이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보석, 하나 하나가 인위적으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원천의 보석이 되어졌다. 물질적 높은 가치로서의 진보석이랄 순 없으매 내면적 깊은 의미로서의 순보석이랄 수 있다.

 

아무리 작아도 수수만년을 이어온 산 돌의 의미를 유한한 우리인간의 머리론 다 측량하긴 어렵더라, 늦은 봄날 물질로서의 산삼발견에 못하지 않은 의미로서 더욱 귀중한 세상발견, 가슴 뛰는 발견이었다.

 

위대한 것은 원래 깊이 감춰져있기 마련인가, 타산적인 눈으론 쉬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한갓 잡석인 산 돌에서 축약된 천지의 오묘함을 찾아낸 행운에 고마워한다. 그럴지언정 책상 위의 조화 3박자가 청년기의 지평을 힘써 구가할 때 난 갱년기의 고개를 아프게 넘고있다.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