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받은 글)

서신(받은 글) 001 <산골짜기의 봄 세상>

필그림(pilgrim) 2007. 6. 10. 10:29
 

<산골짜기의 봄 세상>



쉰이라면 아직 본격적으로 지팡이에 의지해야할 나이는 아니고 건강도 또한 지팡이를 반드시 벗삼아야할 만큼 크게 쇠약하진 않다.
뒷짐 지기만으로도 넉넉한 어슬렁거림, 산책이랄 것도 없는 근거리 어슬렁거림엔 필요가 없을지라도 제법 생각이 필요한 장거리 산책, 숨이 찰 정도의 산책이라면 지팡이는 매우 유용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내겐 나무로 된 지팡이가 3개 있다. 천연의 자연물에서 저절로 취한 것임은 물론이려니와 치장과 장식이라곤 하나라도 붙어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지팡이보단 그저 작대기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흔한 작대기와 정감 어린 지팡이의 구분엔 분명한 분별이 있다.
물푸레나무지팡이는 기왕에 도끼자루로 쓰려던 것인즉 한 손 집기용으로 가장 짧아서 허리께 높이에 불과하며, 사용연륜도 5년으로 가장 길고 끄트머리도 제법 닳아서 뭉뚝하다. 연륜뿐만이 아니라 정갈한 송이버섯과 귀한 산삼을 가까이할 때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음으로 해서 의미와 인연이 특히 소중할 수밖에 없다. 3년을 두고두고 우려 가며 써먹는다는 '노루 때려잡은 몽둥이'라는 말거리완 대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무게가 들어있음이다.
다른 두 개는 비교적 근년에 구비된 신갈나무지팡이로 가슴높이가 하나, 어깨높이가 하나이다. 이처럼 실지용도로서의 지팡이는 재료구분이 아니라 높이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사(豪奢)를 생각한다면 키 높이로 자라는 명아주를 가을에 회수 정성껏 가공해 유명한 청려장(靑藜杖)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폼을 생각한다거나 타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 산골짜기에서 한가롭게 재료와 형상을 따질 일은 아닌 것이다.
약한 경사지거나 평지를 산책할 땐 중간정도의 지팡이가 좋다. 손에 잡는 높낮이를 옮김에 따라 몸에 미치는 피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목과 등이 편하려면 가급적 높이 잡아야 좋고 허리가 편하려면 다소 낮음이 편타. 이곳에서야 완전평지가 아닌 엄연한 산길인고로 오르매와 내리막의 손잡이 높이가 약간씩 달라짐은 당연하다.
매일 다니는 똑같은 길도 비가 내려 미끄럽거나 눈 덮인 길인 경우는 지팡이 중에도 가장 긴 지팡이가 긴요하다. 두 손으로 몸의 중심을 적극적으로 의지하기 위해선 어깨 높이정도로 길이가 확보되어야 쓸모가 있음이다. 이 경우야말로 산지 등산용의 짧은 지팡이는 다만 작대기에 불과할 뿐이다.
엄청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속이라면 지팡이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특별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산지를 오름에도 지팡이는 역시 편하다. 그럴 때야말로 가급적 짧은 게 좋다. 등거리와 나뭇가지, 잡동사니들에 의한 거치적거림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무의식중에 긴 지팡이를 들고 나갔다면 온전한 수풀탐색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만다. 지팡이를 내버리거나 적당히 쉬운 지역으로 타협을 해야 한다.
가볍고도 충분히 견고하기 위해선 사용되는 재질은 제법 까다로운 편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해서 아무 나무나 사용해도 되는 건 아닌 것이다. 소나무나 참나무가 지팡이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덴 단지 무겁다는 데에 이유가 있음이다. 육신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짐이 되어 짐이다. 이 같은 원리를 몰랐을 땐 몇 개나 수풀 속에 던져버렸는지 모른다.
물론 가장 짧은 지팡이 즉 단장(短杖)은 재질선택에 얼마든지 여유가 있다. 원래부터 길이가 짧고 가늘기 때문에 견고함을 위주로 선택해도 크게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길이가 긴 지팡이일수록 불가피 재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길이가 길어지면 굵기도 자연히 굵어지기 마련이고 체적으로 본다면 가장 짧은 지팡이에 비해 3배가 넘는 체적을 갖기 때문에 무게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짐이다.
이처럼 용처에 따라 지팡이의 길이를 구분할 줄 알며 길이에 따라 재료를 고를 줄 안다면, 형상과 장식이야 어떻든 그 사람의 지혜와 사고의 깊이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어진다. 어느 지팡이에 손때가 가장 많이 묻어있나를 살피면 이해를 넘어 애정까지 느껴진다.


지팡이가 단순히 육신의지용으로만 국한되진 않는다. 도로를 거닐다가 무단히 도로를 지나는 누룩이 뱀 녀석을 만나면 훌쩍 산으로 던져 올려 무심한 자동차바퀴로부터 피신시켜주는 역할도 하고, 언덕사면에서 흘러내린 잔돌들을 퉁겨 멀리 치워주는 역할도 하는 등 생각보다 많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해준다.
누가 안볼 땐 팔랑개비처럼 빙빙 돌려보기도 하고 잔돌을 상대로 골프 치는 시늉도 한껏 누려본다. 정히 불필요해지면 지팡이를 등과 양팔사이에 가로지름으로서 허리 펴기 용도로도 그만인 것이다. 이를 생각해서라도 긴 지팡이는 무조건 질기고 가벼워야 한다.

옛날처럼 골짜기마다 맹수가 출몰하거나 길목에서 불연 중에 산적이 튀어나올라치면 호신용 목검으로 방어수단도 되었겠지만, 지금세상에서야 심리의지용 이상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새벽산책을 마치고 뒷목걸이로 지팡이를 울러 메고 돌아오다 보니 이 서방 네 무논에 엊저녁까지 잠잠하던 개구리 알들이 아침녘엔 오골오골 살아서들 움직이고있다. 아직 알에서 덜 깬 녀석들은 남은 껍질을 마저 깨치느라 되우 부산스럽고, 먼저 나온 녀석들은 제 알집을 먹어치우느라 역시 부산스럽다.
일제히 둥그렇게 안쪽으로 향한 무수한 꽁무니들, 검은 실낱같은 꽁무니들의 팔랑거림을 바라보노라면 눈이 어지럽다. 그래서 이 아침이 더욱 풍성해진다.
논물 퇴수구에 잔돌 몇 개 깔아 발로 한번 꾸-욱 밟아줌으로써 임자 모르게 생긴 임시 무논저수지가 드디어 제 말을 해 주고 있음이다.
요즘 유행인 최첨단 생명공학은 숙제도 어렵고 시간과 비용도 엄청 든다지만, 남의 허튼 생명을 살리고 키워내는 자연의 생명역학은 이처럼 쉽고도 즐겁고 돈도 안 든다.
좀더 여유를 베푼답시고 이번엔 입수구에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길다란 신갈나무지팡이로 세로 금 하나만 주-욱 당겨주면 생명역학은 그것 일획으로 그만인 것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나무지팡이가 제 용도의 절정을 수행한 것이다.
맑은 물이 그어진 금을 따라 콸콸 입수되고 잠시 생긴 흙탕물이 제 흐름의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리로 저리로, 돌다가 멈추고, 밀리다 결국엔 흩어지는 물길의 자취마다 조무래기 생명들이 지치지도 않고 팔랑대고있다. 내 속이 다 시원해짐은 물론이려니와 수천 수만의 올챙이들도 마냥 좋기만 하여라.
묵은 벼 그루터기에 어린 물장군 한 마리가 옹골차게 매달려있다. 녀석이 다 자라면 같은 물 속 식구인 올챙이 깨나 주워먹게 씩씩하게 생겼다. 누가 빨리 성장하느냐의 시간다툼에 맡겨야 하겠지, 가느다란 풀잎 마른 줄기로 슬쩍 건드려보면 흙탕물을 푸르륵 일으키며 바닥 깊숙이 숨어든다. 집게손가락 하나 살며시 담가보면 물 온도가 아직은 낮은 편이라 행동이 너나 할 것 없이 둔할 것이다. 아직 덜 성장한 소금쟁이도 물 표면에 굳은 듯 멈추어있다.
말로하기 쉬워 올챙이, 물장군, 소금쟁이를 한 입으로 말할 뿐, 한 물 속에 살면서도 모두가 서로 천적관계에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누굴 돕고 누굴 외면할 것인가, 똑같은 생명일지언정 비교가치란 냉혹함 속에서 매년 이때쯤이면 반복 되이 당혹감을 느껴야 한다. 나로서 자연의 벗들에게 온전히 우렁이각시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어쩔 수 없는 갈등에 휩쓸릴 때가 있음이다.
이런 이유로 피조물들의 생사(生死) 여탈(與奪)엔 가급적 간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애초부터 해두었지만, 의지소관과 행동소관이 반드시 같을 순 없다. 행동은 의지 몰래 자꾸 우렁이각시가 되고 만다는 뜻, 분명한 모순일지언정 그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후회가 없다. 하느님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했으니 의지 몰래 하는 행동을 두고 구태여 진위(眞僞)선악(善惡)을 따질 일은 없음이다.


혹시나! 싶어 내친걸음으로 다가간 냉기 도는 바위골짜기의 우물터 맑은 물 속에도 아니나 다를까, 연례행사처럼 맑고 투명한 도롱뇽이의 알 다발이 어느새 둥두렷이 머물러있다. 이제까지 여러 해 동안 누구는 산란장으로, 누구는 식수로 사용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새삼스러울 일 또한 없다.
누가 치우는 일이 없기에 온갖 낙엽들이 내려앉아 겨우내 곰삭아도 곧 움터올 자연의 약초 당귀들로 인해 중화가 될 테고, 바위 면에 달라붙는 솔이끼에 작은 고사리 등속은 덤으로 주어지는 부수적인 은혜일 것이다. 어쩐지 물맛이 마냥 부드럽고 친근하기만 하드라니----,


오늘이 절기로서 청명(淸明)이란다. 이때로부터 느릿하던 한해 시작의 걸음마는 대번에 뜀박질로 달려갈게다. 음전하고 수줍은 소녀로 다가왔던 봄이 금새 처녀로 성장해 마냥 팔랑거리는 모습이란 곧 이럴 것이다. 그의 그림자인 듯 먼 나라에 유학간 내 딸년이 불쑥 그리워진다.
잠시 부는 건듯 바람에 물 표면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은빛 햇살은 골짜기 세상 하루의 이력을 찬찬히 키워내기 시작하면 난 그의 눈부심에 찔려 눈을 가늘게 뜬다.
북 창 밖 층층나무가지 하얀 새움은 하루가 갈수록 제 크기를 키워가더라도 내게 날개는 돋지 말아라, 기왕에 멈춘 걸음 이들을 두고 내 차마 혼자 날진 못하리,


* 덧붙이기 *
본의 아니게 깊은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었음에 배전의 사과말씀을 우선 드리며 근작 수필 한편을 드립니다.
하필 지극히 불운한 시간대에 참으로 잔인한 삭제과정을 밉다시 지켜보셨습니다. 님께선 참으로 불운하셨습니다. 혹시나 그럴까봐 들키지 않으려고 무려 16시간에 걸쳐 꼼짝 않고 삭제과정에 들어있었습니다만, 결국 아픔을 드리고 만 것 같습니다.
산골짜기에서 모뎀을 사용하는 구형저속통신망이 어련했겠습니까, 중간에 몇 차례의 중단이 있었고 그 사이에 하필 지워지지 않고 몰래 숨어있던 글이 '많이 울게 하소서!'였습니다.
닉네임을 마저 삭제하려고 들른 메일 방에서 '아차!' 싶었답니다.
제우스 님의 반듯한 심성을 아프게 함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사죄의 머리를 깊이 숙입니다.


모든 걸 다 차치하고 흔적도 없이 물러가려 했으나, 불가피 내포한 애초부터의 의문점 하나 때문에 감히 다시 다가섭니다. 또 한차례의 결례가 되지 않길 바라며, 혹시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73학번은 아니신 지? (학마을 총총)